“여성에 대한 무차별 폭력에 손놓은 정부, 미필적 고의 아닌가”
‘헤어지자’고 했다고,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성들이 죽어가는 세상이다. 여성들은 목숨을 지키려 인터넷에서 ‘안전이별’을 검색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교제폭력은 형법 상 폭행·살인 등 기존 범죄에 포함될 뿐 별도의 공식 통계가 없어 전모를 알기도 어렵다. 다만 한국여성의전화가 2009년부터 매년 언론 보도를 집계해 내놓는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를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난해 기준 남편이나 애인 등 전·현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138명이다. 올해도 교제 폭력·살인이 연일 보도되고 있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달 29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만난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여성을 상대로 한 무차별 폭력이 일어나고 있는데 정부는 이를 ‘일부의 일’로 개별화하고 있다”며 “국가가 국민이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형벌권을 갖고 있는데 손 놓고 있는 것은 비정상적”이라고 비판했다.
―‘ 분노의 게이지’를 2009년부터 집계했다. 어쩌다 시작한건가?
“ 처음엔 이렇게 오래하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오늘도 또 죽었다’는 보도를 보면 통계를 찾아보는데 우리가 원하는 통계값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언론보도를 보며 수치를 세기 시작했고, 정부에는 계속 실태 파악과 대책 논의를 촉구했다. 1년에 1000건 정도 되는 살인 사건 중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살펴보면 되는 일이다. 경찰이 올해 처음으로 전체 살인·살인미수 사건(2023년 기준) 가운데 배우자·연인을 상대로 한 범행을 집계했는데, 778명 중 192명이었다. 하지만 가해자·피해자의 성별은 밝히지 않았다. 그러니 제대로 된 통계 발표를 일부러 안한다는 생각이 든다.”
―왜 일부러 발표를 안한다고 생각하나?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은 여성이 피해자,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전세계적으로 그렇다. 다만 역대 정부 모두 이처럼 성별로 나뉘는 것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 같다. 폭력·살인으로 드러나지만, 사실상 이는 모두 성차별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윤석열 정부는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시작한 정부 아닌가.”
―이런 통계는 왜 필요한가?
“통계가 있어야 정책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왜 폭력이 살인까지 이어졌는지 알아야 된다. 이는 고위험군 집단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사전에 징후를 파악해야 한다. 또 (통계 발표는) 사회적 인식개선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은 다 통계를 낸다.”
―15년 간 집계하며 달라진 양상이 있나?
“최근엔 ‘신고했는데도 살해당했다’라는 케이스를 주목하고 있다. 이 범죄는 워낙 암수가 많아서 신고했다는 것 자체가 큰 변화다. 하지만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살해당한다는게 문제다. 지난해부턴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한 폭력·살인’도 집계하기 시작했다. 이는 굉장히 안 좋은 징후다. 보통 가해 남성들은 본인의 배우자나 애인에게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젠 진주 편의점 여성 무차별 폭행 사건이나 신림동 공원 살인 등 모르는 여자를 상대로 한 사건이 벌어진다. 우리 사회 전반에 ‘그래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얘기여서 위험한 신호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확실히 정부 기조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조를 말하나?
“여성을 상대로 한 무차별 폭력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일부 이상한 사람이 벌인 일’로 치부하며 개별화하고 있다. 가해자 신상 공개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본다. 실익도 없고, 그저 피해 여성이 운이 없어 벌어진 일이 된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제 폭력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보도가 많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데이트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2006년쯤이다. 그 전부터 교제 관계에서의 폭력은 존재했지만 잘 부각되지 않았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언제부터 폭력이 시작됐는지’ 물어보면, 30% 이상이 결혼 전이라고 얘기한다. 가정폭력으로 드러나기 훨씬 전부터 사회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교제 폭력과 데이트 폭력 중 어떤 용어가 적합한가?
“뭐라고 부르든 상관은 없는데, ‘데이트’라는 개념보다 ‘교제’라는 범위가 좁아서 입법 과정에선 문제될 수 있다. 데이트 폭력은 사귀는 또는 사귀었던 관계 뿐 아니라, 사귈 것을 염두엔 둔 관계에서도 벌어진다. 예를 들어 남성이 ‘저 여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아는 관계에서, 여성은 굉장히 취약한 위치에 있다. 이런 것까지 데이트 폭력의 범주 안에 있는데, 법안 발의되는 걸 보면 대상이 확 줄었다. 최근 국민의힘이 발의한 데이트폭력 방지법은 ‘보호하지 않는 대상’으로 혼외 데이트 관계, 동성애를 규정했다. 하지만 기혼자가 데이트 폭력 피해를 입는 일은 매우 흔하다.”
―교제 폭력과 일반 폭력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르는 사람이 나를 때리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고 가해자 수사·재판과 관계없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가 까운 관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피해자가 편안하게 있을 공간 자체가 사라진다. 가해자가 나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관계성 때문에 신고 자체도 차원이 다른 일 돼버린다. 사람들은 애인이 때렸다고 하면 ‘바로 신고하고 헤어지라’고 하는데, 막상 당사자는 그 상황이 닥치면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해하며 도와주려고 하기도 한다. 문제를 일으킨 건 가해자인데, 피해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바뀐 것이다. 피해자로서 위치 잡기가 굉장히 어려운게 이 폭력의 가장 큰 특징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공감을 한다는건가?
“그렇다. 이해를 안 하면 본인이 못살겠으니까. 내가 고른 사람이 폭력범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게 너무 어렵고, ‘왜 그랬을까’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교제폭력의 극단적 결과가 교제살인이다. 전조징후가 있나?
“폭력의 유형이 굉장히 여러가지인데, 특히 통제가 너무 심한 경우가 매우 위험하다. 주변 사람들 못 만나게 하고, 직장도 못다니게 되고, 핸드폰이나 이메일도 모두 공유되는 식이다. 신체적 폭력이 없었다해도 상대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선 그 다음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좋아하는 사이면, 이게 통제인지 챙기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다.
“ 처음에는 모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나를 변화시키려고 할때는 통제 행위로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친구를 못만나게 해서, 실제 못만나거나 몰래 만나야 하는 상황이 되는건 통제다.”
―왜 통제하려 하는건가?
“제일 큰 이유는 피해자를 고립시키기 위해서다. 자원이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이걸 막는다. 상담해보면, 내담자들은 가해자에게 ‘너는 내 손바닥 안에 있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관계를 끝내려고 할때 통제가 엄청나게 심해지고 스토킹 행위가 일어난다. 그래서 스토킹처벌법 입법 운동도 시작된거다. 가해자는 상대가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내건데 어딜가’ ‘내가 죽든지 니가 죽든지’ 이런 얘기를 하고 실제 살인까지 벌어진다.”
―경찰에 신고해도 왜 해결되지 않나? 거제 교제살인은 11번 신고했다던데.
“경찰 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이 폭력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것 같다. 거제 살인 사건 같은 경우엔 피해자가 신고한 것도 많았지만 가해자가 신고한 것도 있다. 경찰이 보기엔 서로서로 신고하는 거니까 ‘화해하고 살아라’ 이런 식의 접근이 됐을거다. 심지어 가해자로 입건된 건 여성 쪽이었다. 싸울때 쌍방 폭력을 많이 얘기하는데, 잘 보지 않으면 억울한 가해자를 만든다. 남성들이 밀치고 때리고 목 조르면, 여성들이 손에 잡히는 핸드폰을 집어던질 수 있다. 이러면 흉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특수폭행으로 입건된다. 방어 행위의 과정이 여성을 가해자로 만들거나 아니면 쌍방폭행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 가해자가 누구인지 잘 살펴달라고 경찰에 요청한다.”
―그런데 신고까지 했는데도 원점이면, ‘누가 나를 도와주나’라는 생각을 갖게될 거 같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 고하면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있다. 우선 피해자 보호를 규정하고 있는 가정폭력방지법과 스토킹방지법 등을 활용할 수 있다. 가정폭력은 법률혼 관계를 중심으로 하지만 사실혼 관계도 포함한다. 또 피해자 보호 조처로서 유치장 또는 구치소 유치도 있다. 다만 이런 조처를 너무 안 쓴다.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하는 이유는 ‘경찰이 와서 데려가겠지’ ‘금방 풀어주진 않겠지’하는 기대인데, 현장에서 ‘이렇게 하지 마세요’라고 가버린다. 보호 조처를 적극 활용해서 가해자와 분리해야 한다. 그래야 피해자가 자기 공간이 생기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경찰 뿐 아니라 검찰·법원 등 사법기관이 나서야 한다. 지난 4월 구미 교제살인 사건도 피해자가 경찰에 세 번 신고했는데, 경찰에서 법적 근거도 없이 가해자 심리상담을 시켰다. 경찰 입장에선 다 처벌하기 어려우니, 상담을 통해 교화효과를 원한거다. 이 상담 5회가 끝나고 여성을 살해했다. 상담은 상담이고 처벌은 처벌이다. 처벌을 안 하면서 상담만 받으라고 하는 거는 그 인생을 이해해 주겠다는 말이다.”
―피해자가 처벌 불원을 하는 경우도 많다.
“ 일단 신고자가 특정되니, 보복이 두렵다. 두번째로는 ‘신고해도 소용없다’는걸 아는거다. 신고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내가 가해자를 강력 처벌해달라고 할 때 내 안전이 보장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또 친밀한 관계의 특성 탓에 가해자가 사죄하면 용서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 6월에 여가부가 피해자 보호 중심의 대책을 내놓았다.
“피해자 보호만 해서는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당신이 조심하라’는 얘기 밖에 안된다.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 사회적 인식 개선이라는 3가지가 모두 이뤄져야 한다. 그러려면 범정부 차원에서 나서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중심을 잡을 여성가족부 장관도 없고, 장관이 있다해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구조다. 대통령이 직접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천명하고 부처들을 움직여야 한다. 2018년에도 범정부 종합대책이 나왔는데 청와대에서 주도했다.”
―이 정부가 유독 뭘 안하고 있는 것도 사실 아닌가?
“보수는 여성을 대등하게 보진 않지만, 보호는 해야되는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국가 가부장이 총출동한다. 그런데 현 정부는 뭔지 모르겠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이 문제를 잘못 건드리느니 안 하는 게 낫다고 확실히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국회에서 교제 폭력 관련 법안은 발의되지만, 계속 임기만료로 폐기된다.
“ 어떤 방식으로 입법하는 게 좋을지 논의가 아직 무르익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교제폭력 방지법 등을 따로 발의한다. 하지만 이건 비효율적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가정폭력과 데이트 폭력 관련법을 통합적으로 만든다. 삶의 방식이 바뀌어서 다 혼인하는 것도 아니고, 동거하면서 교제하기도 한다. 또 이 두 가지 폭력이 너무나 똑같은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별도 입법을 하는 것은 낭비다. 교제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다. 이건 둘 사이에 연락한 기간, 횟수, 주변 사람들의 증언 등을 보면 판단할 수 있다. 22대 국회에선 정리가 됐으면 한다.”
―정부도 국회도 임무를 방기하는 것 아닌가?
“여성폭력 추방 주간을 맞아서 지난 월요일(25일) 사망한 여성들의 숫자만큼 신발 전시를 했다. 또 피해자 재판을 다니다보면 ‘여자는 사람이 아닌가보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너무 사람 취급을 못받는다. 피해자 보호 예산도 너무 적고 쉼터도 너무 적고 좁다. 인프라가 거의 없다”
―여성 관련 범죄가 너무 꾸준히 나오니까 둔감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아무도 놀라지도 않는다. 화천 토막살인 사건도 사람들이 ‘애인을 죽였겠지’하고 다 추정을 한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형벌권을 갖고 있는건데, 손을 놓고 있는 것은 너무 비정상적이다.”
―대책이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말하면 영향을 받는다. 한국 사회에선 어쨌든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말하고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야 한다. 지금 상황은 윤 대통령의 미필적 고의라고 보는게 맞다.”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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