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이 ‘톱질’ 1년 만에… 아르헨, 포퓰리즘 마약서 깨어났다
집권 1년 만에 인플레 완화
지난달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상공회의소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 연단에 오른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50분 넘게 11개월간의 성과를 소개했다. “불황은 끝났다. 우리는 사막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국가는 성장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그는 “신이시여, 전지전능한 힘으로 이 나라를 축복해 주소서. 자유 만세!”라고 외쳤다. 객석에선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극우 성향으로 평가받았던 경제학자·방송인 출신 ‘정치 아웃사이더’ 밀레이가 오는 9일 취임 1주년을 맞았다. 임기 초반엔 밀레이의 극단적 정책에 따른 부작용 때문에 야권과 국민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집권 1년 만에 가시적인 성과들이 나타나며 밀레이식 개혁에 점점 힘이 실린다는 평가가 나온다.
핑크 타이드(중남미 좌파 물결)의 본산으로 오랫동안 페로니즘(후안 페론 전 대통령을 추종하는 좌파 포퓰리즘)이 득세해 온 아르헨티나에서 밀레이의 등장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유세 내내 “쓸데없는 복지는 삭감하겠다”며 전동 톱 퍼포먼스를 선보인 그는 “아르헨티나 통화를 미국 달러로 바꾸겠다” “중앙은행을 없애겠다”는 파격 주장을 해 충격을 줬다. 경제난에 허덕이던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은 밀레이는 당시 좌파 정권의 현직 재무 장관과 붙어 2위로 결선에 진출한 뒤 결선에서 12%포인트 차로 대역전승을 거뒀다.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으며 취임한 밀레이는 “썩은 병폐를 도려내겠다”면서 정상적인 국가로의 회복을 선언했다. 강력한 긴축이라는 ‘극약 처방’을 하며 경제 체질 개선에 나섰다. 최우선 추진 정책은 방만한 국가 재정 개선이었다. 1940년대 이래 페로니즘 정치인들이 장악해 왔던 아르헨티나는 만성적 재정 적자와 이를 메꾸기 위한 중앙은행의 과도한 돈 풀기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왔다. 가끔 정권 교체에 성공한 우파 정권이 이런 기조를 바꾸려다 보조금 삭감 등에 불만을 가진 국민에게 외면받고, 다시 페론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런 과정에서 아르헨티나 페소화의 통화 가치는 급락했고, 외환 보유고가 동나 국가 부도(디폴트·채무 불이행) 사태를 겪은 것만 아홉 번이다.
밀레이는 취임 직후 “(나라를 파탄 나게 한) 악의 근원은 ‘재정 적자’다. 충격 요법으로 이를 해소하겠다”며 살인적인 ‘재정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행정명령을 통해 부처 수를 18개에서 9개로 절반으로 줄이고 올해 공무원 7만명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실상 해고를 결정했다. 에너지와 교통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고, 은퇴자 연금을 동결하며 국민들에게도 고통 분담을 요구했다. 기존에 진행되던 공공시설 건설 사업의 87%(예산 기준)를 중단하는 한편 공립대학 재정 지원금도 동결했다.
이 같은 ‘허리띠 졸라매기’ 끝에 아르헨티나는 지난 1월 12년 만에 처음으로 월별 ‘재정 흑자’를 달성한 이후 올해 내내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상반기 정부 지출액은 지난해보다 29%나 줄었다. 정부가 지출하는 돈을 줄이고, 중앙은행도 이에 맞춰 시중에 푸는 돈을 조이자 물가는 잡히기 시작했다. 임기 초반까지는 가시적인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서 물가도 빠르게 안정되고 있다. 밀레이가 취임한 지난해 12월 전월 대비 물가 상승률을 25%를 기록했는데 최근엔 2%대로 떨어졌다. 전년 대비 물가 상승률로 따지면 197.3%(지난 11월 기준)로 여전히 높아 보인다. 하지만 6개월 전인 지난 5월 289.4%를 기록한 것을 감안하면 물가 상승률이 가파르게 내려가는 상황이다.
이 같은 ‘군살 도려내기’는 시장의 신뢰도 되돌렸다. 과거 아르헨티나는 무분별한 돈 풀기로 통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인위적으로 환율을 통제하고 이를 ‘공식’ 환율이라고 정부가 발표했다. 시장 가치와 맞지 않는 공식 환율은 외면당했고 환율 거래는 대부분 암시장에서 이뤄지는 등 외환 시장이 붕괴된 처지였다. 밀레이는 외환 시장을 정상화하겠다며 취임 직후 ‘공식’ 환율을 시장 가치에 맞게 조정했다. 현재 환율은 1달러에 1030페소 정도로 암시장 시세인 1120페소와 거의 비슷해졌다. 투자자도 돌아오고 있다. 취임 직후인 지난해 12월 11일 97만6823 정도였던 메르발 지수(아르헨티나 대표 주가지수)는 2일 229만5432까지 올라, 약 1년 만에 135% 상승했다.
다만 부작용도 없진 않다. 공공 사업 축소 여파로 경제 성장 속도는 느려졌다. 정부 보조금·연금 등이 줄면서 가구의 가처분 소득이 급격히 감소해, 빈곤율·실업률 등은 지난해보다 상승했다. 이런 부작용 탓에 대통령의 인기가 하락하리라는 전망도 나왔지만, 밀레이의 경우 아직은 지지율이 50%대를 오가며 기대보다 높은 성원을 받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밀레이는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개혁을 일관성 있고 진실되게 추진함으로써, 유권자들이 ‘사탕발림’을 벗어나 힘겨운 진실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교훈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고 했다. 하상섭 국립외교원 교수는 “밀레이는 2000년대 초부터 이어져 온 저성장의 늪을 탈출하는 일보다 공공 부채 해결이 더 시급하다고 봤고 ‘고통을 분담하자’며 국민과 의회를 설득했다”며 “경제 개혁을 완수하려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국민들을 이해시키면서 위험을 관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페로니즘(페론주의)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1946~ 1955·1973~1974 재임)이 주창했던 대중 영합적 경제·사회 정책. 복지 확대와 임금 인상, 외국 자본 배제, 철도·항만 국유화 등을 추구한다. 뮤지컬·영화 ‘에비타’의 주인공인 부인 에바 페론이 재단을 만들어 전국에 학교와 병원, 보육원을 짓는 등 복지 정책 확대에 앞장서 페로니즘을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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