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트럼피즘’에서 배운다
‘트럼프 2.0’ 시대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이제까지 낯설고 기이하게 생각하던 ‘트럼피즘’(trumpism)이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트럼프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기괴한 정치’와 익숙해져야 한다. 좋은 정치를 바란다면 적어도 트럼피즘의 기괴함을 이해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권위주의적이고, 반항적이며, 극우적이다. 트럼프는 거짓말을 하고, 천박한 언행을 일삼고, 법을 어긴다. 미국의 보수주의 세력은 이 깡패이자 거짓말쟁이고 반동적인 정치인을 47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정말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다. 본래 보수주의는 미덕, 조화, 위계와 영원한 진리에 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는데 트럼피즘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간다는 사실이 괴이하다. 무엇보다 기괴한 것은 거짓말이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정치의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괴하다’는 말은 지난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가 트럼프를 정치적으로 낙인찍기 위해 사용한 정치적 논평이다. 트럼프 진영에서 해리스를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캣 레이디)이라고 거론하자 해리스 진영은 트럼프와 밴스를 ‘기괴한 사람’으로 몰았다. ‘이상하다’ ‘기이하다’ ‘기괴하다’라는 뜻의 영어 낱말 ‘위어드’(weird)는 이렇게 부정적 의미의 정치적 수사가 되었다. 이민자들이 개, 고양이를 먹는다거나 아이가 없는 여성은 불행하게도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정말 기괴하다. 이런 말에 정색하며 대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상식이 있다면 그저 ‘기괴할’ 뿐이라고 대응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이 사람, 정말 기괴하지 않은가요?’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언제 기괴한 사람들이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나요?’ ‘기괴하다’는 논평으로 상대방을 정치적 담론에서 배제하려 했지만, 현실은 정반대가 되었다. 기괴한 사람 트럼프가 권력을 잡고 정치를 규정하게 된 것이다.
기괴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참 이상한 시대다. 이러한 현상이 꼭 미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이상한 정치인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기괴한 정치’가 뉴노멀이 된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1심 선고에 대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의 논평은 참 이상하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말로 싸우는 것으로 서로 논쟁하고 토론하는 과정에 일부 허위가 있을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허위가 있더라도 정치 생명을 끊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조국 대표는 말한다. 국민이 가장 많이 지지하는 유력한 대선 주자에 대한 유죄 판결은 명백한 정치 탄압이고 공포정치라고 하면서 그는 미국 대선을 인용한다. “미국 대선에서도 후보 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허위가 있었는데 기소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트럼피즘에 빠진 우리 정치
조국 대표의 말을 들으면 하나의 의심이 든다. 그는 트럼피즘에서 정치를 배웠는가? 아니, 배워야 한다는 뜻인가? 인종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일 뿐만 아니라 법 위에 군림하려는 권위적인 백인 노인이 정권을 잡은 트럼피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온갖 법적, 도덕적 비위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잡았다면 그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 비난과 혐오는 금방 찬탄과 열광으로 변화한다. 트럼프의 대선 승리의 결론은 매우 간단하다. ‘승리를 원하는 사람은 범죄 의도를 숨겨서는 안 된다.’ 정권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면 거짓말을 하고, 천박하고 선정적인 말을 내뱉고, 법을 무시해도 된다. 트럼피즘의 정치는 이렇게 거짓말, 가짜 뉴스, 선동과 선전을 정권 획득의 효율적인 수단으로 정당화한다. 지금의 미국은 진보의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으로 철저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MAGA)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용납된다는 것이다. 현실이 거짓이라면 거짓인 현실에 대한 거짓말은 대안적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정치적 궤변이다.
이런 종류의 궤변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슬픈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위태롭게 만드는 김건희 여사 사태를 보거나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살펴보면, 트럼피즘은 이미 우리 정치 안에 깊숙이 침투한 것처럼 보인다. 두 사건은 수많은 거짓말과 가짜 뉴스의 덩굴에 얽혀 있어 무엇이 진실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모두 허위와 거짓말이 마치 정치에 필연적인 수단인 것처럼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단일대오 넘어 대화 정치로 가야
대통령을 돕는 김건희 여사의 행위를 ‘국정농단’이라고 한다면 “그건 국어사전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말은 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어떤 사안에 대해 물론 아내와 남편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의견을 낼 수도 있다. 소위 말하는 베갯머리송사는 지극히 사적인 일이다. 그러나 국정농단은 공적인 문제이다. 국정은 나라의 정치를 말하고, 농단은 이익이나 권리를 독점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정농단은 공적 권한이 없는 사람이 권리를 독점하여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간단히 말하면 사적인 권력과 이익을 위해 공적인 정치를 파괴하는 모든 현상이 국정농단이다. 농단(壟斷)이라는 말이 본디 깎아 세운 듯한 높은 언덕을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의 본질인 다양성을 파괴하고 자신의 의견과 권리만을 내세우는 독선과 독재는 정치를 농단한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정치를 냉소와 무관심으로부터 구원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우리는 트럼피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말로 싸우는 것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행위하고 말하면서 자신을 보여주고,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참여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며, 자신의 의견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의견과 이념이 다른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곳에서만 말로 싸운다. 타인과 다른 집단을 인정하는 곳에서만 말로 싸우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이거나 같은 의견을 강요받는 곳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요즘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에서 각각 다른 이유에서 강력하게 요구하는 ‘단일대오’는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싸울 일도 없다. 순종과 복종만 요구될 뿐이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선고로 비명계가 움직이면 “당원과 함께 죽일 것”이라는 민주당 최민희 의원의 말은 이를 잘 말해준다. 민주당이 똘똘 뭉쳐 정치검찰과 맞서자는 말이 세게 표현된 것이지만, 다른 의견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와 경향은 변하지 않는다.
올바름과 진실성, 진리와 정의는 민주적 담론이 실현되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다. 나의 의견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공동의 진리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 트럼피즘은 바로 이러한 기본적 전제조건을 부정한다. ‘기괴한 사람들’은 말도 되지 않는 이상한 소리를 진리라고 우기면서 자기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짜 뉴스 유포자로 낙인찍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기괴한 사람들’은 본래 정상적인 공동체의 바깥에 있었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괴한 사람들’이 이제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백인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인종차별주의자를 ‘기괴하다’고 조롱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되었다. 정치로 해결할 문제를 법률로 해결하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기괴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법을 정치화한다. 자칫 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정치라고 오해될까 두렵지만, 그것이 트럼피즘의 핵심이다.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위대해지려면 자신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확신하는 도널드 트럼프는 세상에 많다. ‘나만 따르라!’는 트럼피즘은 민주적 법과 토론도 인정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거짓과 선동으로 정권을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롤모델이다.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독선과 독재의 단일대오를 깨고, 허위와 거짓을 넘어 말로 싸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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