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의 산업혁명 판본, ‘북과 남’

한겨레21 2024. 12. 3. 12: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소설로 읽는 경제학]엘리자베스 개스켈이 생생히 재현한 19세기 영국 공업도시의 사회상
‘북과 남’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동명의 비비시(BBC) 드라마 한 장면. 2004년 방영됐다. 아이엠디비 갈무리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소설 ‘북과 남’의 주인공은 마거릿 헤일입니다. 18살의 마거릿은 아름답고 당당한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작가의 모습을 많이 반영한 캐릭터라 개스켈은 소설의 제목을 ‘마거릿 헤일’로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집필을 의뢰했던 찰스 디킨스는 전통적인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남부와 산업혁명 이후 급속히 발전한 공업도시 북부의 가치관 대조를 강조하기 위해 ‘북과 남’이라는 제목을 권했고 최종적으로 채택됐습니다. 이 소설의 첫 주제입니다.

자부심 강한 남부 사람들, 그러나 가난 앞에서…

마거릿의 고향은 잉글랜드 남부 햄프셔의 헬스톤입니다. 마거릿의 ‘품위 있는 소박함’에 끌린 런던의 변호사 헨리 레녹스가 고향에 대해 궁금해하자, 마거릿은 ‘사실 마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교회가 있고 그 근처 공유지에 장미꽃으로 뒤덮인 오두막 몇 채가 있을 뿐인 테니슨의 시에 나올 만한 마을’이라고 답합니다. 마거릿의 아버지 리처드 헤일은 이곳에서 잉글랜드 국교회 목사로 봉직 중입니다. 딸을 런던 사교계에 진출시키고 싶어 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뜻에 따라 마거릿은 런던의 이모 집에서 10년 동안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는 존 베리스포드 경의 아름다운 딸로 유명했는데 선택은 달랐습니다. 이모는 나이가 많고 부유한 쇼 장군의 조건을 보고 결혼한 뒤 런던에서 유복하게 살았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비록 가난하지만 성품이 온화하고 유쾌하며 잘생긴 헤일 목사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습니다.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습니다. 이모는 ‘마리아 언니는 사랑으로 결혼했으니 뭘 더 원하겠어?’라면서 부러워하지만 마리아의 생각은 다릅니다. 조카의 결혼식에 사정이 있어 참석을 못한다고 했지만, 진짜 이유는 결혼식에 입고 갈 드레스를 살 형편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교구 목사의 완벽한 모범이었던 마거릿의 아버지는 가난한 교구민들을 도우며 검소하게 살면서 작은 서재에서 고전을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가족에게 폭탄선언을 합니다. 교회의 모습에 실망했다면서 양심에 따라 성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고민을 들은 옥스퍼드 플리머스대학의 학자 벨은 밀턴시의 개인 교사 자리를 주선해줍니다. 이모네 가족이 사는 런던은 정치와 사교의 도시이고, 헬스톤은 가난한 농촌이며, 옥스퍼드는 고전과 학문의 전당으로 다 다른 곳이지만 모두 남부 잉글랜드로 전통을 지키는 지역입니다.

북부 대 남부… 자본가 대 노동자

반면 헤일 가족이 새롭게 자리잡은 북부의 밀턴은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입니다. 헤일에게서 개인 강습을 받는 독신의 존 손턴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학교를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직물점에서 일해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면서도 가난에 굴하지 않고 노력해 밀턴의 영향력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직물업자로 성장했습니다. 손턴과 마거릿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부터 서로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손턴은 증기 해머의 위대한 힘과 섬세한 조절력을 설명하는 등 밀턴이 배출한 위대한 발명가와 사업가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면서 남부는 낡고 오래된 틀에서 지루하고 부유한 삶을 누리는 귀족 사회라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땀 흘리고 고생하는 북부를 선택하겠다고 공격합니다. 사랑하는 남부를 비방하는 것에 발끈한 마거릿은 남부가 모험과 진보에서 뒤떨어질지 모르지만 북부와 같은 고통과 증오, 절망적인 불평등 그리고 매연은 없다고 항변합니다.

마거릿이 언급한 북부에 팽배한 적대감은 손턴이 자랑스러워하는 산업혁명의 이면입니다. 거대한 공장의 등장으로 대규모 노동자 집단이 밀턴에 밀집했고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적대감은 계속 커졌습니다. 이것이 이 소설의 두 번째 주제입니다. 마거릿이 손턴을 만나 북부 제조업자들의 야망을 이해했다면, 히긴스 가족과의 교류를 통해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히긴스는 거칠지만 비굴하지 않은 노동조합 활동가였습니다. 이들은 임금을 삭감하려는 밀턴의 제조업자들에 맞서 파업을 진행합니다. 노동운동의 기반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합니다. 파업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고 경찰을 포함한 공권력은 자본가의 의중에 따라 움직입니다. 아동 노동과 산업재해에 대한 아무런 규제도 없었습니다. 히긴스의 어린 딸 베시도 면직 공장의 솜먼지가 폐에 가득 찬 면폐증(綿肺症)에 시달리다 죽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뒤를 이은 여성작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손턴은 ‘1824년까지 존재했던 노동조합 금지법이 다시 시행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식하고 고집 센 바보들이 잘 돌아가지도 않는 멍청한 머리들을 모아서 지혜를 갖춘 사람들의 운명을 지배하려 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협상에 나서는 대신 다 해고하고 아일랜드에서 노동자들을 수입해 작업장에 투입합니다. 이에 격분한 일부 노동자는 손턴의 공장으로 몰려가고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고조됩니다. 마거릿이 폭력 사태를 막기 위해 나섭니다. 개스켈은 치밀한 취재를 통해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을 묘사하는데, 양쪽 모두의 입장을 충실히 전달하면서 일방적으로 비판하지도 또 일방적으로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산업혁명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사회성 강한 소설이지만 동시에 섬세한 심리묘사도 일품인 작품입니다. 갈등하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워나가는 마거릿과 손턴의 관계는 한 세대 전에 나온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베넷과 미스터 다아시를 연상시킬 만큼 흥미롭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생애

‘북과 남’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동명의 비비시(BBC) 드라마 한 장면. 2004년 방영됐다. 아이엠디비 갈무리

엘리자베스 개스켈은 1810년 런던에서 태어난 소설가입니다. 태어난 다음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개스켈은 너츠퍼드의 이모 집에서 자랐습니다. 이 시기 학교에 다니며 예술, 고전, 예절 교육을 받았습니다. 1832년 비국교도 교회의 목사로 재직 중이던 윌리엄 개스켈과 결혼한 뒤 맨체스터에 정착했습니다. 남편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지원과 노동자 교육 등 사회사업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개스켈이 1848년 발표한 첫 소설 ‘메리 바턴’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후 찰스 디킨스가 발행하던 주간지 ‘하우스홀드 워즈’에 여러 편의 소설을 연재했습니다. 대표작인 ‘크랜포드’(1853)는 어린 시절 살았던 너츠퍼드를 배경으로 한 것이고, ‘북과 남’(1855)의 무대인 가상의 밀턴시는 맨체스터시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그녀의 작품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산업과 노동을 다룬 탁월한 작품이었음에도 오랫동안 무시됐습니다. 당대의 비평가들은 ‘여성은 아무리 노력해도 노사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깎아내렸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은 복잡한 사회적 갈등을 묘사한 선구적인 산업소설로 재평가됐습니다. 비비시(BBC)는 ‘북과 남’을 포함해 그의 세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했습니다. ‘북과 남’ 한국어판은 여러 판본이 있는데 가장 최근에는 2023년 민승남이 번역해 문학동네에서 출간됐습니다.

*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입니다. 2주마다 연재.

‘북과 남’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동명의 비비시(BBC) 드라마 한 장면. 2004년 방영됐다. 아이엠디비 갈무리
‘북과 남’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동명의 비비시(BBC) 드라마 한 장면. 2004년 방영됐다. 아이엠디비 갈무리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