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현장 레바논] 전쟁의 비극 베이루트…'중동의 파리' 옛 영광 찾을수 있을까
나스랄라 사망장소 등 엿새간 취재…"누구든 전쟁경험 안돼" "베이루트 진면목 보여주고 싶어"
60일간의 일시휴전 중에도 이-헤즈볼라 산발적 충돌…아슬아슬한 살얼음판
(베이루트=연합뉴스) 김동호 특파원 =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그리고 그 남쪽 어귀 헤즈볼라의 근거지인 다히예.
기자는 휴전 발효 첫날인 지난달 27일(현지시간)부터 이달 2일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베이루트 해변과 고층건물이 석양에 붉게 물든 모습을 비행기 창문 밖으로 바라보며 라피크 하리리 공항에 착륙해 레바논에 첫 발을 내디뎠다. '중동의 파리'라는 베이루트의 옛 별명이 떠오를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런 첫인상은 공항 밖으로 나서자 곧바로 뇌리에서 사라졌다.
밤거리에 나부끼는 헤즈볼라 깃발을 보자마자 긴장감이 몰려왔다.
고개를 돌리면 폭격에 무너진 건물이 바로 눈에 들어왔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인터뷰할 수 있을 정도로 비극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다히예를 자주 드나들다 보니 골목길에서 풍기던 냄새가 겉옷과 신발에 배었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가 잠들 때까지 콧속에 맴돌았다. 분쟁지역을 주로 취재하는 언론인들이 피와 시체 때문에 생기는 이 현상을 '죽음의 냄새'라고 부른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한 현지인이 기자에게 "누가 물어보면 북한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어떻겠냐?"라는 조언을 한 적도 있다. 대한민국 출신이라고 하면 자칫 서방과 이스라엘 편으로 인식돼 해코지당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행히 베이루트 시민들은 외지인에게 개방적이었다.
기독교인이든, 수니파 이슬람교도든, 헤즈볼라를 지지하는 시아파이든 할 것 없이 기자의 질문에 귀를 기울여줬다. 상당수가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고, 기자가 프랑스어를 못 알아듣는다며 아쉬워하는 경우도 꽤 됐다.
다만 헤즈볼라는 외부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상태였다.
조직 수장이었던 하산 나스랄라의 첫 추도식이 열린 지난 30일 기자는 헤즈볼라 검문 요원들에게 두 차례 휴대전화기를 빼앗겼다.
레바논 당국의 취재·촬영 허가를 받았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갤러리 앱에서 '휴지통 비우기'까지 해서 사진을 말끔하게 지운 뒤에야 전화기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기자는 다히예 방문 중 집안 남성이 모두 헤즈볼라 소속인 한 가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4형제 중 맏형인 살라(62)는 지난 9월 27일 이스라엘군의 벙커버스터 폭격에 나스랄라와 함께 죽었다. 동생 후세인(52)은 지난달 16일 이스라엘 접경지에서 전사했다.
이제 후세인의 쌍둥이인 하산이 그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불과 며칠 전 얼마 전 후세인의 장례를 치른 라마(19)는 아버지와 같은 얼굴을 한 삼촌마저 전장에 나간다는 소식에 황망해하고 있다.
라마는 평소에는 한국 노래와 드라마를 즐기는 여느 나라의 10대 소녀와 비슷한 모습이다. 그는 기자에게 "가수 중에는 윤기, 그러니까 BTS의 슈가를 제일 좋아하고 K-드라마는 '알고있지만'을 재미있게 봤어요"라고 말했다.
라마는 헤즈볼라가 레바논의 시아파 무슬림을 이스라엘로부터 지켜주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 발발 후 한 사우디아라비아인 친구가 "헤즈볼라는 이슬람국가(IS)랑 똑같아"라며 연을 끊은 일은 너무 속상하다고 했다.
라마는 "정치적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전쟁은 누구든 경험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나보다 어린아이들은 얼마나 더 큰 상처를 입겠나"라고 말했다.
현장 취재를 마친 2일 귀국을 앞두고 기자는 며칠간 조언을 구하며 친해진 베이루트 시민 엘리 아부 자우데(36)를 다시 만나 작별 인사를 했다.
자우데는 "베이루트의 진짜 면모를 보여주지 못해서 정말 아쉽다"며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꼭 가족들과 함께 여행오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는 "레바논이 지난 몇년간 항구 폭발 사고, '10월 17일 혁명', 이번 전쟁까지 안좋은 일을 연달아 겪는 탓에 관광지와 유적지도 관리가 제대로 안 된 상태지만, 이번 휴전이 계속되면 1년 안에 경제도 살아나고 모든게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루트가 유럽풍의 개방적이고 매력적인 '중동의 파리'로서 면모를 되찾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혔다.
하지만 공항 가는 길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을 부르짖는 헤즈볼라와 하마스 인사들의 사진들이 여전히 잔뜩 내걸려 있었다.
레바논은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 60일간의 휴전 합의 이후 '일시적 평화'를 누리고 있지만, 최근 양측의 산발적 충돌이 계속되고 있어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모습이다.
d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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