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우선주의’ 美 정치... 글로벌 공급망 재편 땐 민주·공화 원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1기’ 때인 2020년 5월 대만의 대형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TSMC 공장을 미국에 유치했다. 애리조나주(州)에서의 실제 공장 착공은 트럼프를 낙선시키고 2021년 취임한 조 바이든 정부가 이어서 실현했다. 바이든은 2022년 건설 현장을 찾아 “우리는 이제 우리의 공급망을 우리의 땅으로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정치 양극화가 심각한 문제로 고착화했지만, 국가의 미래 및 안보와 직결되는 사업 지원책에 대해선 민주·공화당이 ‘원팀’이 되어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꾸준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지원,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견제에 대해선 특히 그렇다. 미국의 거침 없는 ‘자국 기업 우선주의’는 세계 1위 초강대국의 자신감과 압도적인 달러 패권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한국 기업이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게 하려면 최소한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이어지는 산업 지원책과 과감한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 정치권은 산업 지형을 정의할 이른바 ‘게임 체인저’에 대해 연구·개발(R&D) 자금 공급, 인재 유치, 파격적인 보조금 등 지원책을 정권과 무관하게 그대로 유지한다. 대표적 사례가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반도체 분야다. 민주당 소속 오바마 행정부(2009~2017년) 말기인 2017년 1월 백악관은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의 지배력 유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중국의 ‘기술 굴기(崛起)’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반도체를 국가 차원으로 육성하고 국가가 주도해 일관된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권고하는 내용이다. 앞서 2016년 오바마 정부의 과학기술자문위원회는 ‘반도체 분야 미국의 장기적 지배력 확보’라는 보고서를 통해 반도체 혁신 촉진을 위한 정부 지원, 중국에 대한 견제책 마련 등을 핵심 권고안으로 내놓았다.
2017년 취임한 트럼프는 반도체를 최우선 산업으로 육성하며 중국을 견제한다는 오바마 정부의 기조를 이어받았다.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수출 금지 등 규제를 강화하는 한편 반도체 기술 안보와 제조 능력 확보 등을 내세워 대만 TSMC에 미국 공장 설립 약속을 받아냈다. 바이든 정부도 이 기조를 이어받아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및 관련 장비 수출 규제를 더 강력히 밀어붙였다.
트럼프 정부가 틀을 잡은 반도체 지원 법안을 바이든 행정부가 계승해 제정하기도 했다. 트럼프 정권 말기인 2020년 6월 미 의회는 ‘반도체 제조 인센티브 법안(CHIPS for America Act)’을 통과시켰다. 미국 내 반도체 장비와 제조 설비 투자 비용에 대해 세액 공제를 제공하고, 첨단 파운드리 등 반도체 공장 건설을 유도하기 위해 연방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예산 배정은 별도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연방 보조금을 통해 전 세계 기업들을 미국으로 끌어들여 미국 내에서 첨단 반도체 시설을 가동하겠다는 구상은 이때부터 틀이 잡혔다.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승리한 바이든은 생산 기지를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꾸겠다는 공급망 재편 정책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발전시켰다. 바이든이 2022년 8월 서명해 발효된 반도체 과학 법(CHIPS Science Act)을 통해 미국은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통해 삼성전자 등 전 세계 반도체 기업을 미국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는 내년 1월 집권하면 해외 기업에 대한 보조금은 줄이겠다고 밝혀 왔지만 ‘미국 내 반도체 산업 육성’이라는 기조 자체를 바꿀 가능성은 매우 낮다.
AI 기술에 대한 지원책도 여러 정권을 거치며 미 정부의 지원이 지속되는 분야다. 오바마 정부는 2016년 ‘인공지능의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정책 보고서를 통해 AI 연구에 대한 장기 투자, 인간·AI 협업 방안 마련, AI의 윤리적·법적·사회적 영향 해결, AI 연구·개발 인력 확보 등 7개 권장 사항을 제시했다. 트럼프의 백악관은 이를 이어받아 구체화했다. 2019년 2월 ‘AI 분야의 미국 지배력 유지’라는 행정명령을 공포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전략 계획을 업데이트하고 구체화했다. 아울러 후속 조치로 AI 전략을 주도할 ‘국가 인공지능 추진법’을 제정하고 ‘국가 인공지능 추진 사무국’을 신설했다. 이 법·조직들은 바이든 정부로 계승돼 지난해 10월 바이든 정부가 발표한 연방 정부의 AI 대처 방안이 ‘AI의 안전하고 안정적인 개발에 관한 행정명령’ 등으로 이어졌다. 미 법무 컨설팅사 ‘민츠’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급격한 기술 변화와 정권 간의 극명한 이념 차이에도 오바마가 발표한 전략과 트럼프가 마련한 다양한 제도, 그리고 바이든이 도입한 지원책 사이에는 놀라운 연속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1기 때의 ‘고립된 미국’을 공격하며 대통령에 당선된 바이든은 겉으로는 자유무역정책을 옹호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 기업과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트럼프가 1기 때 시행한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을 더 강력히 시행했다. 특히 미국의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하는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율은 바이든 정부 때 가파르게 올라갔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부과한 중국산 철강·알루미늄 고율 관세를 그대로 유지했을 뿐 아니라 반도체·전기차·배터리·태양전지 등 핵심 부문은 관세율을 상향 조정했다. 지난 5월 중국산 전기차 관세를 25%에서 100%로, 반도체는 25%에서 50%로 인상하기로 결정했고 전기차 배터리 관세는 7.5%에서 25%로 끌어올린다고 발표했다. 백악관은 “미국 근로자와 미국의 기업을 보호하려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오바마 정부가 시행했던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미국산을 사자) 조항을 트럼프와 바이든 행정부가 그대로 이어받기도 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 미 의회와 정부는 ‘미국 회복 및 재투자법(ARRA)’을 제정해 연방 정부가 조달하는 물품 중 미국산 비율을 50% 이상 구매하도록 했다. 트럼프는 이 규정을 대폭 강화해 일반 제품의 미국산 비율을 55%로, 철강 등 핵심 제품은 95%까지 끌어올리도록 했다. 바이든은 이에 더해 취임 직후인 2021년 1월 일반 제품의 미국산 비율을 2029년까지 75%로 올리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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