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기후위기 리포트] 11월 한달새 봄꽃·단풍·폭설…고장난 생태시계
9~11월 평년 대비 높은 기온 영향
도내 진달래·복수초 등 11월 개화
은행나무 단풍 절정 20일 늦어
급격한 온도 차이 수종 유지 취약
낙엽활엽수림 등 휴면기 준비 부족
5. 계절이 사라졌다
올해로 11년째 강원도 산림과학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영희 주무관의 업무는 기후변화에 취약한 산림식물을 조사하는 일이다. 매주 1회 춘천 강원도립화목원을 비롯해 화악산, 광덕산, 설악산을 찾는 그의 머릿 속엔 ‘지도’가 있다. 그에 따르면, 3월이 되면 도립화목원의 한 가운데는 ‘노란 밭’이 된다. 복수초가 자라는 곳이다. 그 옆에는 층층나무가 있다. 겨울이 되면 떨어진 층층나무의 낙엽이 복수초의 겨울눈을 포근히 덮는다. 화목원의 한쪽 구석에 앉아 초록 이끼만 무성한 땅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봄이 되면 이자리에 똑같이 식물이 올라와요.” 지난 10여년이 그랬다. 하지만 최근 식물의 생체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다. 11월의 도립화목원에서 복수초가 발견됐다. 금강초롱꽃의 싹도 올라왔다. 계절이 사라졌다.
■11월에 발견된 복수초·개나리
지난 20일 오전 찾은 춘천의 강원특별자치도립화목원. 권보람 녹지연구사, 김영희 주무관, 홍성건 주무관과 산림식물 관찰에 나섰다. 기후변화 취약식물 보존을 위한 모니터링에 참여하는 연구원들에게 식물의 생체시계는 정직하다. 매년 같은 곳에서 싹을 피우고 잎을 떨군다. 김 주무관은 “항상 똑같은 자리에서 얘네들이 다시 올라오니까 그게 너무 신기하고 기쁘다”며 “화악산, 광덕산에 가면 제일 먼저 올라오는 것들이 너도바람꽃, 미치광이풀”이라고 했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눈 속을 헤집고 잎눈이 나왔는지 찾아본다”며 “2월이면 날이 춥지 않느냐. 눈이 있는데도 싹이 올라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올해는 유독 관찰일지에 ‘고사’를 적은 날이 많았다. 김 주무관은 지난 2월 14일 광덕산에서 너도바람꽃이 성장을 시작한 모습을 봤다. 일주일 뒤인 2월 23일엔 잎눈 파열을 앞두고 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5일 뒤인 28일 잎눈은 눈 속에서 발견됐다. 갑작스레 떨어진 기온으로 잎눈은 냉해를 입었다. 결국 3월 5일의 ‘고사’가 광덕산 너도바람꽃의 올해 마지막 기록이 됐다.
도립화목원의 진달래 역시 개화하지 못했다. 이곳 진달래는 지난해에 비해 꽃눈 파열이 10일 이상 빨랐다. 하지만 지난 3월 25일 관찰일지에는 ‘냉해로 인해 개화되지 못했다’고 적혀있다. 홍 주무관은 “2월 10일부터 낮에는 굉장히 따뜻했다”며 “꽃눈 파열이 대체로 10일 이상 빨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꽃눈이 터진 뒤 개화까지는 약 15일이 걸리는데 3월 초에 기온이 팍 내려갔다. 개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복수초는 도립화목원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다. 이날 복수초가 피는 구역엔 층층나무며 주위에서 떨어진 이파리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낙엽을 들춰보던 김 주무관이 소리쳤다. “어, 여기 있다. 올라와 있다!” 겨울눈 상태로 올 겨울을 나야 할 복수초가 꽃받침 모양을 드러내며 성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놀라움도 잠시, 홍 주무관은 “나오면 안 되는 건데 나왔다”며 “날이 추워지면 얼어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난 29일, 눈이 온 뒤 다시 찾은 화목원에서 복수초는 꽃받침이 조금 자란 상태였다.
해마다 차이가 있지만 도립화목원의 가지복수초 성장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지난 2010년엔 3월 2일에 첫 성장이 관측됐지만, 올해는 1월 31일이다. 한 달 가량 성장이 앞당겨졌다.
김 주무관은 하루 뒤인 속초 설악산에서도 노란봄꽃을 발견했다. 21일 설악산국립공원 권금성 케이블카 입구 부근에서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그가 11월에 설악산에서 개나리를 본 건 올해가 처음이다. 그런데 5일 뒤인 26일부터 설악산을 비롯한 강원 지역에 눈이 내렸다. 3일간 미시령에는 12.5㎝의 눈이 쌓였다. 11월 폭설은 117년만에 처음이다.
철이 아닌 데도 꽃이 피는 현상을 두고 ‘불시개화’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난 10월 제주도엔 벚꽃이 피었고, 11월에 개나리, 철쭉이 발견된다. 원인으로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평년보다 높았던 기온이 지목된다. 11월 중순인데도 강원 지역 곳곳에선 20도가 넘는 날이 이어졌다. 권 연구사는 “꽃을 오래 본다고 좋아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며 “멸종위기종이라면 기온 하락을 겪고 그대로 고사하는 등 수종 유지에 취약한 환경을 맞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늦은 단풍…휴면기 준비 부족으로
가을철 단풍이 드는 낙엽활엽수림 역시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날이 따뜻하다 갑작스럽게 기온이 떨어지거나, 눈이 내리며 강풍이 불면 나무는 ‘휴면기’를 준비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도립화목원의 백목련은 지난 4월 14일 개엽을 시작했지만 이날(21일)까지도 나뭇가지에 잎이 붙어 있었다. 권 연구사는 “이는 단순히 낙엽이 끝나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라며 “단풍, 낙엽 등 식물의 생체시계가 모두 지연됐다는 것”이라고 했다.
단풍이 90% 이상 물들 때를 ‘절정’으로 보면, 올해 도립화목원의 은행나무 단풍 절정은 11월 12일이었다. 10년 전인 2014년엔 10월 20일 절정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올해가 약 20일 늦다. 권 연구사는 “올해는 특히 날이 따뜻해 단풍이 잘 안들었다”며 “그런데 갑자기 날이 추워지면서 잎이 떨어지는 상황을 맞는 경우도 생긴다. 신갈나무가 그렇다”고 했다.
그는 “낙엽기는 잎이 가지고 있던 영양소를 줄기로 보내며 임시 저장하는 기간인데, 이것이 원활하지 않으면 다음해 개엽에 활용하지 못하는 등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했다. 길어진 가을의 ‘역설’이다. 이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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