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을숙도에 가면, 백남준의 작업 연대기를 한눈에
미디어아트의 아버지로 꼽히는 비디오 거장 백남준(1932~2006). 그의 이름이 연말 한국 미술판에서 새삼 뜨겁게 호명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30일부터 부산 낙동강변 을숙도에 있는 부산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 사후 국내 최대 규모의 회고기획전이 시작됐다. 한국에서 가장 큰 백남준 컬렉션 소장처이자 백남준 연구와 전시의 본산으로 꼽히는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가 부산현대미술관과 손잡고 꾸린 공동기획전 ‘백남준,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이다.
전시를 단박에 풀이하는 열쇳말은 ‘많다’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국내 어떤 백남준 관련 전시보다도 작품이 많다. 고인이 몸담았던 1960년대 서구 전위 예술그룹 플럭서스와의 작업과 미디어아트 전시의 시원 중 하나로 꼽히는 1963년 독일에서의 첫 개인전에 관한 사진 아카이브, 백남준 비디오아트의 기본 골격을 형성했던 1973년 작 ‘글로벌 그루브’ 등 초중반기 대표작들, 1980~2000년대 ‘티브이 로봇 시리즈’, 1990년대 이후 작업한 걸작인 대형 비디오영상 설치작품 ‘108 번뇌’, 레이저 설치작품 ‘삼원소’ 등이 줄줄이 나온다. 출품 물량만 160점이 넘는다.
덕분에 백남준의 플럭서스 초기 활동부터 2006년 별세 전까지 관심 갖고 새롭게 작업한 레이저 아트까지 작업 연대기를 한달음에 살펴볼 수 있게 됐다.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라는 생전의 경구처럼 과학과 기술로 미래의 예술을 예견하고 앞서 실행하면서 지금도 영감과 자극을 주는 백남준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다.
2층에서 시작하는 전시는 까만 들머리 통로 안쪽에 자리한 1961년 퍼포먼스 영상 ‘손과 얼굴’로 운을 뗀다. 쉴 새 없이 손을 꼬물거리면서 얼굴을 가렸다 드러냈다를 되풀이하는 이 16분짜리 영상은 스승이던 현대음악 거장 슈토크하우젠과 함께 기획해 만든 작품이다. 후대 미디어아트의 맹아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작가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예고하는 듯한 명작으로 꼽힌다.
플럭서스 그룹 시절 전위적 열정을 빨간 벽으로 상징한 다음 공간의 당대 사진 아카이브에서는 ‘플럭서스 챔피언 콘테스트’(1962)란 당시 백남준의 실험 퍼포먼스 사진이 단연 눈길을 끈다. 여러 국적의 남성들이 양동이 주변을 에워싸고 소변을 보면서 자신의 국가를 부르는데, 백남준은 그 옆에서 스톱워치를 든 채 누가 오래 볼일을 보는지 시간을 재고 있다. 기존 제도 예술의 권위를 조롱하는 백남준식의 블랙 유머가 내비친다.
사진들이 붙은 벽 앞 공간에선 1963년 독일 부퍼탈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 나온 티브이 작품들의 이미지와 자석을 대면 컬러상이 파장을 일으키는 ‘자석 티브이’, 작가의 조작으로 다양한 주사선이 움직이는 ‘왕관 티브이’ 등의 실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뒤이어 일본에서 전자공학 등 기술을 공부하고 미국에 진출한 백남준이 만든 첫 로봇인 ‘로봇 K-456’(1964)과 기술자 아베 슈야가 그린 로봇 장치의 도면 등이 나왔다. 백남준과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의 유명한 협업 퍼포먼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포스터와 공연 장면을 담은 영상도 같이 선보인다.
전시의 묘미 중 하나가 따로 개설된 2층 영화관이다. 그의 비디오아트를 본격적으로 알린 ‘글로벌 그루브’(1973)를 비롯해 작가 스스로 자기 예술을 설명하는 인터뷰 영상 ‘백남준: 텔레비전을 위한 편집’(1975), 마지막 영상작품 ‘호랑이는 살아 있다’(1999)까지 백남준의 비디오 명작 10여점을 볼 수 있다. 어맨다 김이 지난해 출시해 호평받은 다큐멘터리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티브이’도 상영된다.
1층은 큰 작품 위주다. 1990년대 티브이 모니터와 조형물을 엮어 만든 로봇가족 연작들이 줄줄이 큰 전시장을 메웠고, 2층까지 잇닿는 천장 높은 공간에는 8m 높이의 소나무, 벚나무 등이 비디오 모니터를 가지에 매단 채 숲을 이룬 ‘케이지의 숲―숲의 계시’란 전시 최대 작품이 만들어졌다. 자연의 생기와 예술 스승 존 케이지를 기리는 마음이 담긴 작품이다. 그 옆에는 대형 걸리버 로봇과 18개의 소인국 로봇으로 이뤄진 설치영상 작품도 배치됐다.
전시 말미엔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에 백남준이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레이저 작품 ‘삼원소’가 나왔다. 영상을 넘어 레이저를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메신저로 보고 조형적 관심을 쏟아부은 노년기 열정의 집약체다. 맞은편에선 광복과 한국전쟁 등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전통 춤, 서태지와 아이들의 히트곡 ‘난 알아요’ 등을 담은 50분짜리 영상이 주마등처럼 108개 모니터를 통해 명멸하며 흘러가는 말년 걸작 ‘108 번뇌’의 아름다운 빛누리를 볼 수 있다.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최를 맞아 손수 제작한 이 작품은 미술관 쪽이 대대적인 정비와 개수를 통해 원래 선명한 영상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번 전시는 출품작·아카이브 160여점 가운데 140점을 별다른 대가 없이 내어준 백남준아트센터의 전시 역량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부산현대미술관이 드넓은 전관 공간을 제공하는 협업 시스템을 이루었기에 가능했다. 3개 공간으로 나눠 ‘연결’의 화두를 추구한 백남준의 50여년 작품 내력을 고고학적인 시선으로 탐색하고 훑어간 전시 얼개 자체는 2022년 백남준아트센터가 10개의 장면으로 나눠 백남준 미디어아트의 전위적 근원을 탐색한 탄생 90주년 특별전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의 기본적 틀을 토대로 했다는 게 센터 쪽의 설명이다. 이 기본틀에 다른 소장처에서 빌린 대형 작품들을 추가하고 공간들을 분절하면서 회고전 모양새를 갖추게 된 셈이다.
하지만 부산현대미술관 쪽은 이런 부분에 별다른 예우를 하지 않았다. 전시 모태가 된 2년 전 센터의 기획전에 대한 소개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지난달 29일 개막식에 지역구 국회의원과 부산시 간부, 시의원의 축사를 읽느라 핵심인 센터와 미술관 담당 큐레이터의 전시 소개말을 빼버리는 결례까지 벌어져 뒷말이 나온다. 내년 3월16일까지.
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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