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시론┃법정] 어느 시각

김찬년 2024. 12. 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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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년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판사

대한민국 헌법 첫 문장의 주어는 ‘대한민국’이다. 헌법 전문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이라는 수식어를 빼놓고 보면 더 분명히 보인다. 1987년 10월 29일 국민투표에 기초하여 헌법을 개정한다고도 전문에 적혀있다. 즉, 나라의 기본 법칙이 무엇인지 정하고 거기에 숨을 불어넣은 주체는 ‘국민’ 혹은 ‘대한민국’이라고 표시된 전체 공동체다.

제1장부터 제10장까지 중 제1장에는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가 적혀있고, 제2장은 거기서 사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국민이 갖는 권리의 내용은 대체로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는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확인한 것이고 의무는 공동체를 유지·존속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다.

공동체와 그 속의 개인이 지켜야 할 구체적인 규칙을 만들기 위해 국회를 두고, 국회의원은 선거로 선출한다는 내용이 제3장에 적혀있다. 국회는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 바꾸어 나갈 현실의 모습을 법의 형태로 만들어 낸다.

제4장은 정부다. 맨 앞부분에 국가 원수(元首)이자 정부의 수반(首班)인 대통령에 관해 적혀 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과 마찬가지로 선거로 선출한다. 헌법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개별 주체에게 각기 권한을 부여하면서 그 권한의 크기와 무관하게, 규칙(입법)이 있고 난 뒤에야 그 규칙을 꾸려갈 정부가 뒤따른다고, 제3장과 제4장의 순서를 통해 밝힌다. 행정부에 의해 공동체의 규칙이 실제로 작동하고 실현된다.

그러고 나서야 제5장에 법원이 등장한다.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하는데, 법관의 자격은 법률로 정할 뿐이고, 달리 선거로 선출한다고 되어있지는 않다(대한민국헌법 제101조 제1항, 제3항). 공동체가 스스로 운명을 정함에 있어 선거만큼 적합한 도구는 없다. 헌법은, 공동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그 계획을 어떻게 실현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선출이라는 방편을 마련해 두었으면서도, 사법의 영역에서만큼은 선출에 의하지 않기로 하였다. 왜 그럴까?

국어사전에는 ‘사법’의 의미가 ‘어떤 문제에 대하여 법을 적용하여 그 적법성과 위법성, 권리관계 따위를 확정하여 선언하는 일’이라고 적혀있다. 이때 ‘어떤 문제’는 이미 벌어진 문제이지 장차 발생할 문제는 아니다.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이 적법하고 타당한지를 되짚어 판단하는 일이 사법이다.

공동체가 더 나은 내일을 향해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뒤처지거나 의도치 않게 고통받는 사람이 발생할 수 있고, 공동체가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구성원도 있다. 그러한 과거의 일에 대해서 평가하는 역할마저 다수결이나 선거로 선출된 법관으로 해결하는 경우에는, 당초의 원칙이나 규칙을 정할 때의 정신은 잊어버리고 이미 발생한 결과만을 놓고 그때그때 다수의 뜻에 맞는 결론이 내려지기 쉽다. 다수가 미리 마련해 둔 규칙을 다수의 이름으로 어기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선출되지 않았기에 독립된 법관이 심판하도록 한 것이다. 누구든 다수에서 벗어나 소수의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법부는 기본권 수호의 마지막 보루이다.

헌법이 제2장에서부터 정해둔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장치로서 삼권분립이 있다. 하나의 단면으로, 법원이 하는 행정재판과 형사재판은 행정부에 대한 견제이다. 행정청이 국민에게 행하는 일반적인 처분과 수사기관이 피의자에게 행하는 수사·기소의 처분은 모두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성질을 갖는다. 비유하건대, 전자가 방 안 공기의 온도를 조절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목욕탕의 온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가 처분을 받는 사람의 몸에 와 닿는 느낌이 더 강렬하고 직접적이다.

행정재판에서는 ‘자치’의 가치를 감안해 행정청의 처분이 명백히 위법한 것이 아닌 이상 재량권의 일탈·남용 여부만을 심사하고, 형사재판에서는 행정청의 재량의 폭을 좁게 보고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배제할 수 있을 때에만 유죄로 인정하면서 구체적인 처분의 내용인 형량까지 법원이 정한다.

부여된 책무를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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