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영화’ 다 털어냈더니…내년 극장가 빈털터리 될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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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곳간이 비어가고 있다. 지난해 초만 해도 제작이 끝나고도 개봉 날짜를 잡지 못하는 이른바 ‘창고 영화’들이 쌓여 문제였는데, 내년부터는 당장 극장에 걸 영화가 부족해질 전망이다. 창고에 쌓여 있던 영화들은 거의 털어냈지만, 주요 투자배급사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새로운 영화 제작이 급감한 탓이다.
1일 씨제이이엔엠(CJ ENM),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뉴),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등 5대 투자배급사의 2025년 개봉 목표인 순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상업 영화들을 취합한 결과, 최대치로 잡아도 10편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올해 투자를 결정하고 내년 촬영에 들어가는 작품은 10편도 안 된다. 주요 배급사의 한 투자심사 담당자는 “투자가 결정되는 편수가 전체적으로 코로나 이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준 것 같다. 극장 관객 수가 여전히 코로나 이전의 60%선에 머물고 있는데다 흥행 양극화가 심해져 투자 결정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장 심각한 건 업계 1위 씨제이로, 내년 개봉을 준비하는 영화가 단 두편뿐이다. ‘엑시트’(2019)를 만든 이상근 감독이 후반작업을 하고 있는 ‘악마가 이사왔다’와 현재 촬영 중인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 ‘어쩔 수가 없다’가 전부다. 새롭게 투자를 결정한 작품은 아직 없다. 씨제이는 최근 배급팀과 마케팅팀을 통합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하기도 했다. 씨제이 쪽이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영화 사업을 철수한다는 소문이 가라앉지 않는 이유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개봉하는 제작비 300억원(추정치)의 대작 ‘하얼빈’의 성패가 내년 이후 사업 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롯데는 여름 시장을 겨냥한 대작 ‘전지적 독자 시점’을 비롯해, 구교환 주연의 ‘부활남’, 마동석 주연의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지만 아직도 개봉을 못 한 ‘행복의 나라로’를 개봉하는 게 목표다. 여기에 한두 작품 더 추가하는 걸 계획하고 있지만, 해마다 7~8편씩 개봉했던 코로나 이전에 비하면 여전히 축소된 규모다.
‘파묘’로 올해 천만 관객을 달성한 쇼박스는 중국 영화를 리메이크한 ‘먼 훗날 우리’, 김윤석·구교환 주연의 스릴러 ‘폭설’, 이제훈·유해진 주연의 ‘모럴해저드’로 주요 라인업을 채웠다. 모두 순제작비 100억원대 이하의 중급 규모 작품이다. 뉴는 내년 설 개봉을 확정한 송혜교 주연의 ‘검은 수녀들’과 여름이나 추석 시장을 겨냥한 조정석·이정은 주연의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 개봉을 준비 중이다. 씨제이나 롯데만큼 저조한 성적표를 받은 건 아니지만 시장이 전체적으로 줄어든 탓에 두 중견 투자배급사의 투자 역시 코로나 이전의 80% 정도에 머물렀다. 대신 배급 대행과 화제작 재개봉 등으로 라인업 전체 규모는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유일하게 과감해진 건 ‘서울의 봄’으로 천만 관객을 달성한 플러스엠의 행보다. 지난 10월 플러스엠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파티를 열고 주요 배급사 중 유일하게 2025년도 라인업과 제작 준비 중인 영화까지 11편을 공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홍정인 대표가 직접 무대에 올라가 “창작자 지원에 아낌없이 투자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플러스엠의 가장 큰 관심작은 황정민·조인성 등 국내 톱스타뿐 아니라 할리우드 스타 마이클 패스벤더가 출연하는, 제작비 500억원대의 나홍진 감독 신작 ‘호프’다. 촬영은 끝났지만 내용상 컴퓨터그래픽 등 후반작업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는 일정 조율로 개봉은 내후년으로 미뤄질 전망이다. 내년에는 유해진·강하늘 주연 범죄영화 ‘야당’, 우도환·장동건 주연의 ‘열대야’ 등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탈주’ 이종필 감독의 멜로영화 ‘파반느’도 지난 9월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이다.
한국 상업영화 개봉 편수가 줄어들면서 최근 늘어난 재개봉 바람은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비긴 어게인’ 등이 재개봉 관객만 20만명 넘게 불러들이며 웬만한 개봉작을 넘어서는 흥행 성적을 내자 오래전 개봉한 걸작 영화뿐 아니라 최근 흥행작들까지 재개봉 열풍에 가세하고 있다. 멀티플렉스 씨지브이(CGV)는 11월부터 ‘월간 재개봉 어바웃 필름’이라는 타이틀로 매달 한 작품씩 선정해 재개봉하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황재현 씨지브이 전략지원 담당은 “외화에 비해 내년도 한국 영화 라인업 부족이 우려되는 상황은 맞다”며 “개봉작이 늘어나는 것도 1차적으로 중요하지만 입소문을 통해 관객을 극장으로 오게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늘어야 장기적으로 산업 전체가 활성화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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