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 키우던 ‘듣보잡’ 섬, 한국 항공역사의 시초가 된 사연[이원주의 날飛]

이원주 기자 2024. 12. 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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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플레인×날飛] 여의도 공항

요즘 집회와 시위의 메카는 단연 광화문역 앞의 세종대로입니다. 하지만 광화문 이전 집회와 시위, 그리고 행사의 ‘핫 플레이스’는 단연 여의도였습니다. 면적 22만9539㎡, 6만9435평이나 되는 뻥 뚫린 공터를 서울에서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목축장→군부대→비행장→광장을 거쳐 공원이 된 여의도공원의 현재 모습. 동아일보DB
많은 독자분께서 알고 계신 것처럼 이 여의도광장의 뿌리는 공항이었습니다. 일제가 전쟁과 수탈에 활용하기 위해 지었다는 아픈 역사가 있지만, 한국의 항공史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간. 이번 ‘날飛’에서는 이 여의도공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통제 밖의 섬, 공항이 되다

조선시대 여의도에 대한 인식은 ‘거기 큰 섬 하나 있다’ 정도였던 걸로 보입니다. 가축을 기르는 공간으로 활용되거나, 가끔 양반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 한강 풍류를 즐기는 공간으로 활용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의도에 사람도 살았는데, 이 사람들은 나라의 통제권 밖에 있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11년(1556년) 4월 4일 기록에는 여의도에 사는 사람들을 “족친(族親)끼리 혼인을 하고 사촌이나 오촌도 피하지 않는가 하면 친척이라도 다른 곳으로 보내어 결혼시키지 않는다”고 묘사했습니다. 여의도는 그만큼 ‘오지’였습니다.

1861년 그려진 한성부 관할 지도인 경조오부도. 왼쪽 아래 ‘여의도’라고 쓰인 곳에 ‘목양(牧羊·양 등 가축을 침)’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군이 공군비행장 부지로 여의도를 낙점하면서 여의도는 ‘중요한 땅’으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이주시켜야 할 주민은 적고, 서울(경성) 중심과는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이 처음부터 공항을 목적으로 여의도에 주둔한 건 아니었습니다. 처음 여의도에 발을 디딘 일본군은 이곳을 ‘여의도연병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연병장’의 구석에 활주로가 있는 간이 비행장이 건설됐습니다.
1920년 그려진 여의도비행장 약도. 오른쪽에 한강줄기가 보입니다. 서울과역사 201호, 서울역사편찬원
여의도가 본격적으로 ‘비행장’이 된 것은 1921년 일본 본토에서 항공법이 제정된 이후입니다. 1922년에는 사실상 정기편이 운항하고, 1927년에는 일본의 항공법에 따른 각종 공항 설비가 여의도에 설치됩니다. 다음 해엔 노량진과 여의도를 잇는 포장도로가 놓입니다. 당시 노량진은 서울의 물류 거점이었습니다. 또 여객 수송을 대비한 대합실과 업무공간도 마련됩니다. 이름도 생깁니다. ‘경성비행장(京城飛行場).’
1933년 활주로 정비를 마친 경성비행장 전경과 이곳에 착륙한 비행기의 모습. 서울과역사 201호, 서울역사편찬원
3년쯤 뒤인 1932년 일본은 여의도비행장을 또 한 번 확장합니다. 이 공사로 여의도비행장은 야간 이착륙이 가능해지는데, 일본에서도 야간 조명탑이 있는 공항은 거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일본은 이후에도 격납고를 늘리고 통신설비 등을 계속 보강합니다. 목적은 만주 비행편을 원활하게 띄우는 것이었습니다. 1931년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처럼 만주를 침략하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이 지역에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기 때문에 ‘출장’ 수요가 많아졌던 배경이 있습니다.

● 안창남부터 민항승객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여의도비행장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조선인 파일럿 안창남의 고국방문비행일 겁니다. 19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을 배운 안창남은 일본과 조선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조종사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안창남의 고국비행방문 당시 모습(왼쪽)과 비행복을 입은 사진(오른쪽 사진 왼쪽 인물). 동아일보DB
그 명성을 안고 1922년 한반도를 찾은 안창남은 12월 10일 1인승 복엽기를 타고 여의도비행장을 이륙해 남산을 끼고 돈 뒤 창덕궁 상공을 날아 다시 여의도에 착륙하는 ‘시범비행’을 했습니다. 이 비행은 조선 사람이 조선 하늘에서 비행기를 조종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안창남의 고국방문비행을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1922년 12월 11일자 지면. ‘한반도 하늘에 최초의 환희, 혹한을 정복한 동포의 열성’이라는 제목으로 많은 사진과 함께 안창남의 고국방문비행을 보도했습니다. 이날 여의도에 몰려든 인원은 5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 이후로 여의도비행장은 점점 비행기로 붐비는 공항이 됩니다. 처음에는 군용 비행장이었지만 점차 민간 비행의 비중도 높아집니다. 1924년에는 아예 공항 관할이 군에서 일본의 체신국,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우정사업본부로 넘어갔습니다. 1929년 봄에는 우편물을 실은 정기편이 다니게 되고 여름에는 일본과 여의도를 잇는 정기편 여객기도 다니기 시작합니다.
1929~1930년 여의도공항 이용 승객 수. 1930년 발간 ‘조선체신협회잡지’
그 시절 누가 비행기 타고 다녔겠나 싶지만, 1930년 5월에는 승객 240여 명이 여의도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수요가 계속 나오니까 일본은 처음에 주 3회를 운항하다가 나중에는 6편으로 두 배나 증편을 하기도 했습니다.

● 너무 열악한 공항

하지만 일본이 여의도를 비행장 부지로 택한 것은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여의도가 한강 하류에 위치한 섬 지대였고, 당시의 치수(治水)는 ‘그런 거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의도는 원래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몽땅 침수되는 섬이었습니다.

1925년 을축년 발생한 대홍수로 한강물에 잠긴 여의도. 동아일보DB
특히 1925년, 을축년에 발생한 대홍수는 여의도비행장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힙니다. 여의도비행장뿐만 아니라 서울 경기 전역이 궤멸적 피해를 입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한강 유역을 따라 피해가 컸습니다. 이 홍수로 원래는 한강 이북 섬이었던 잠실은 한강 본류가 바뀌면서 한강 이남 지역이 되어 버립니다. (이 새로 바뀐 한강 본류가 ‘신천(新川·지금의 잠실새내)’이고, 원래 한강 본류의 흔적이 남은 공간이 바로 석촌호수입니다.) 을축년 대홍수로 발생한 피해액은 1억322만 원인데,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9.5%에 달하는 비중입니다.
요즘의 석촌호수 전경.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 본류가 잠실 이북으로 바뀌고 남은 ‘원래 한강 본류’의 흔적입니다. 동아일보DB
수시로 침수되는 부지에 염증을 느낀 일본은 여의도공항을 개축하는 한편 다른 공항 부지를 물색합니다. 이때 결정된 ‘신 경성비행장’ 부지가 바로 김포, 지금의 김포공항 부지입니다. 1938년 공사가 시작됐고, 1944년 완공됩니다. 당시 사료를 보면 김포공항은 활주로가 무려 네 본이나 있는 대형 공항이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여의도비행장(왼쪽, 경성비행장)과 김포비행장(오른쪽, 신경성비행장)의 조감도. 김포비행장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과역사 201호, 서울역사편찬원
다만 김포공항이 완공되고 나서도 한동안 민간공항 역할은 여의도가 이어갑니다. 김포공항 완공 직후인 1945년에 광복이 됐고, 광복 이후 김포공항은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한 미국이 자기네 군 전용 공항으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민간항공과 우리 공군은 계속 여의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민항기는 광복 이후 16년이 지난 1961년에야 김포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 이제는 광장으로

이후 여의도공항은 빠른 속도로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1970년에는 여의도 공군기지에 주둔하던 K-16 비행단이 성남으로 옮겨가며 여의도는 ‘공항의 역사’를 끝내고 ‘광장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을 ‘대개조’한 걸로 유명한 김현옥이었습니다. 서울 ‘도심’으로 불리는 시청 앞 세종대로, 명동과 강변북로 등이 모두 이 김현옥 시장 때 정비됐습니다. 여의도광장도 이때 조성되는데, 김현옥 시장은 지긋지긋한 여의도 침수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밤섬을 폭파해 물길을 확보하고 여기서 나온 흙과 돌로 여의도에 제방을 쌓았습니다. 이 제방이 바로 지금의 윤중로가 됐고, 공항 부지는 1972년 ‘516 광장’이란 이름이 붙은 광장이 됐습니다.

1989년 10월 8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요한바오로2세 교황의 집전으로 열린 세계성체대회 장엄미사 광경. 당시 여의도공원에 모인 인원은 약 65만 명으로 추산됐다. 동아일보DB
지금은 여의도공원으로 탈바꿈한 이곳에는 공항 흔적이 딱 한 군덴 남아있습니다. 문화마당 한쪽에 비행기 모형이 전시돼 있는데,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수송기인 C-47입니다. 그 뒤로는 공군 창설 60주년 기념탑이 세워졌습니다. 광복 70주년인 2015년 조성된 상징물들이지만, 지금 여의도공원에서 옛 공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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