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 중심 경영’은 진짜 가능할까 [김상철의 경제 톺아보기]
재계 극렬 반발하지만 “법 개정해도 달라지는 것 없어” 평가도
(시사저널=김상철 경제 칼럼니스트(전 MBC 논설위원))
일반 소액주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이사회의 결정이 너무 잦다. 최근에는 이수그룹의 정보기술(IT) 소재 계열사 이수페타시스의 유상증자 발표가 문제가 됐다. 이수페타시스 측은 설비 증설과 사업 다각화를 위한 증자라고 설명했지만, 기업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도되는 증자에 대해 주주들의 비난이 쏟아졌고 주가는 급락했다. 회사가 증자를 결정하는 과정에 교수 출신 사외이사가 포함된 이사회의 반대는 없었다.
주식의 가치 평가와 합병 비율에 대한 논란 끝에 결국 무산됐지만, 지난 7월 두산밥캣이 두산로보틱스와의 합병을 결의했을 때도 두산밥캣 이사회는 제동을 걸지 않았다. 고려아연이 결국 포기한 2조5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경영권을 지키려는 대주주를 위한 증자라고 할 수는 있지만 주가 급락으로 일반 소액주주는 피해를 봐야 하는데 증자를 결정했던 이사들이 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 2020년 9월 LG화학이 배터리 사업을 떼어내 LG에너지솔루션으로 물적분할을 단행했을 때도 이사회는 막지 않았다. 2021년 SK케미칼의 물적분할이나 카카오의 쪼개기 상장도 주주들의 비난을 받았다.
지배주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를 지키면서 경영진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이사회의 존재는 의미가 크다. 일상적인 기업 경영은 대표이사와 임직원이 하지만 회사의 중요한 결정은 원래 이사회의 고유 권한이다. 1960년에 제정된 우리나라 상법에는 특별히 '경영자'에 대한 별도의 개념이 없다. 대신 주식회사 경영의 핵심적인 의사결정은 주주총회에서 선임한 이사의 회의체인 이사회 몫이다.
대주주 경영권 위협받아…중요 결정은 '멈칫'
공식적으로 이사회는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으로서 대표이사 선임과 경영 목표 설정, 업무적·재무적 성과의 평가, 이익 배분 등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말 그대로의 '이사회 중심 경영'은 현실이 아니다. 의사결정은 여전히 지배주주와 실제 경영진의 몫이고 이사회는 형식적인 절차의 하나로서 기능할 뿐이다. 주주를 대신해 경영자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하는 이사회가 때로는 일반 주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거듭되는 논란 속에 더불어민주당은 주주에 대한 기업 이사의 직접 책임을 강화하는 상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확정했다. 현행 상법은 이사회가 '회사'에 대해서만 충실 의무를 다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개정안에서는 충실하게 의무를 다해야 할 대상이 '주주'까지 확대된다. '자산 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의 집중 투표제 의무화'와 '감사 위원 분리 선출 규모 확대' 등도 담겼다.
재계는 민주당의 상법 개정안에 대해 소송 남발과 투기자본의 경영권 공격 확대로 기업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고 반대하고 있다. 이사회가 자칫 어떤 의사결정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경제단체들의 반응을 보면 상법이 민주당 뜻대로 개정되면 정말 우리 기업의 경영 행태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보인다. 대주주의 경영권이 쉽게 위협받고 이사회는 일반 주주들의 소송 제기를 우려해 중요한 결정도 미루기만 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로 상법이 민주당의 원안대로 개정된다 해도 상법 개정을 추진하는 쪽에서 기대하는 이사회의 변화는 그렇게 쉽지 않다. 재계가 우려를 표시하는 만큼 경영권 공격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지도 않는다. 현실은 단순하지 않다. 법에 명문화된 규정을 넣는다고 해도 법원에 의해 집행될 수 있는 실체적 의무로 인정되는 건 다른 문제다. 우선 주주라고 해도 대주주와 일반 소액주주, 기관투자가, 그리고 사모펀드나 헤지펀드 등은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다. 이해관계가 다른 주주들의 이익을 모두 보호할 방법을 찾기는 어렵다.
최근 삼성전자는 10조원에 이르는 자사주 취득 방안을 발표했다. 자사주 취득과 소각은 대표적인 주주 친화 정책 중 하나지만 최근 주가 하락의 근본적인 이유는 경쟁력 약화 때문이다. 자사주 취득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길게 보고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하는 데 쓰는 게 더 낫다고 할 수도 있다. 원칙적으로 기업의 수익을 주주 배당과 임금, 그리고 미래의 성장을 위한 투자자금으로 배분해야 할 때 어떤 방안이 기업과 주주를 위해 최선인지를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어렵다. 어떻게 결정하든 법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상법 개정해도 이사회 책임 강화되기 힘들 것"
엄밀히 얘기하자면 지배주주와 소액주주의 이익은 다를 수 있어도 회사의 이익과 일반 주주의 이익은 대부분 일치한다. 주주에 대한 이사회의 의무를 강조하는 미국에서도 정작 이 문제에 대한 판례는 매우 드물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더구나 주주에게 충실해야 한다고 해도 개별 주주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는 인정받을 수 없다.
우리나라 기업 현실에서 이사회 경영이란 사실상 오너 경영과 전문경영인 체제가 절충점을 찾은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사회 중심 경영'이라고는 하지만 많은 기업에서는 이사회 의장까지 맡은 기업주가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오너 경영에 투명성을 강화한 정도라고 보는 게 맞다. 지금 수준의 한국 기업에서 독립적인 이사회가 경영 판단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사 선임 과정부터 독립적이지 못하다. 경영진에 의해 선임된 이사들이 경영진을 견제하고 감시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회사의 사업에 관한 이해와 전문성도 부족한 경우가 많다. 한국 기업의 이사회는 교수, 법조인 또는 고위 공직자 출신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들이 구체적인 경영 판단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는 힘들다. 이사회 중심 경영을 강화하는 것이 추세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법적으로 경영에 책임을 지는 등기이사는 맡지 않으면서 권한은 모두 행사하는 기업주도 많다.
좋은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결론은 아직 없다. 그러나 투명하고 건전한 책임경영, 선진 지배구조 구축과 제대로 된 운용은 우리 기업의 과제다. 좋은 지배구조는 기업의 지속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주주와 경영자를 이어주는 이사회의 역할은 기업 지배구조의 핵심이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 뛰어들면서 MBK파트너스가 제시했던 명분도 지배구조 개선이었고 구체적으로는 이사회 중심의 지배구조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사회는 대주주에 대한 견제와 경영진에 대한 감시를 위해 존재한다. 좋은 이사회는 경영진에 불편한 곳이어야 한다. '이사회 경영'은 이사회가 경영자들에 대한 실질적 인사권을 가질 수 있어야 가능하다. 실제 소유와 지배구조를 무시한 채 법 개정만을 통해 이사회가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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