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극장] 장영실의 초상화는 진짜 얼굴이 아니다?
장영실은 조선 세종 시기를 대표하는 과학기술자다. 우리에겐 수많은 과학 기구를 만들어낸 인물로 영화와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너무나 잘 알려졌다.
그러나 친숙한 인상과는 달리 장영실에 관해 정확히 묘사한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장영실을 둘러싼 오해를 풀어보자.
장영실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의 전근대 과학자로 항상 꼽힌다. 그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인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노비 출신으로 세종의 신임을 얻어 면천을 받고 호군(護軍, 정4품)의 품계에까지 올랐던 이력 때문이다.
그러나 장영실에 관한 이 이상의 정보는 베일에 싸여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장영실의 생몰연도를 정확히 모른다. 그가 고려 말 전서를 지낸 아산 장씨 장성휘의 아들인지도 불분명하다. 심지어 그가 어떤 여생을 보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종합하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장영실의 삶에 관해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간 장영실은 1385~1390년 사이에 태어났으리라 추정돼 왔다. 그러나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주자소 현판(1857년 제작)에서 갑인자(1434)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의 정보가 발견됐다.
여기서 장영실은 계유년(1393)에 태어났다고 기록됐다. 물론 이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다른 유명 인사들의 생년 정보나 본관의 정보도 틀린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그가 1390년 즈음에 태어났으리라는 그간의 추정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장영실의 본관은 충남 아산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판에는 경주 장씨로 적혀 있다. 이러한 차이 역시 현판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아산 장씨 족보에 따르면 장영실은 고려 말 전서 벼슬을 지낸 장성휘의 유일한 아들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장성휘의 아내와 아들 장영실이 관기 및 관노로 전락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세종실록'의 기록 또한 이와 다르다. 실록에는 장영실의 아버지가 중국(원나라) 에서 귀화했고 어머니는 동래현의 관노였다고 나온다.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장영실 또한 노비였다는 점이 분명히 기록된 자료다. 1433년(세종 15년)노비에서 면천돼 상의원 별좌에 임명됐다는 것으로 보건대 그가 노비였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생몰년도와 출신에 관해 조금만 살펴봐도 장영실의 명성에 비해 실제 정보는 빈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를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인자한 미소를 띤 장영실의 초상화를 봤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과학기술인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장영실의 초상화가 남겨져 있는 것일까?
사실 장영실의 초상화는 현대의 창작물이다. 2000년에 박영길 화백이 장영실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아산 장씨 100명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 공통된 특징을 추출해 '과학적'으로 그린 결과물이다. 장영실의 초상화는 과학기술자의 것 답게(?) 탄생한 셈이다. 물론 장영실의 출신이 아직 불분명하기 때문에 추후에 영정의 모습이 바뀔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장영실에 관한 오해는 그가 세웠다고 알려진 '과학적 업적'에서도 드러난다. 대표적 예가 바로 측우기다. KAIST 과학도서관 앞 잔디밭에는 측우기를 옆에 두고 자를 오른손에 든 장영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천안아산역과 부산대,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 앞뜰에도 동일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산 장영실과학관에서 제공하는 장영실 연대기에도 측우기는 1441년 장영실이 제작했다고 돼 있다.
사실 장영실이 측우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다. 우량을 측정할 그릇인 측우기를 제안한 것은 훗날 문종이 될 세자 이향(李珦)이었고 그 의견을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에서 긍정적으로 판단해 측우기를 제작하게 됐다는 점은 분명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때 장영실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장영실이 측우기를 만들었다고 알려진 것은 그의 활동 연대에 기반한 추정에 가깝다. 측우기가 처음 만들어진 때는 1441년 약간 개량해서 정식화한 때는 이듬해인 1442년이다. 이 즈음은 장영실이 아직 기술자로서 활동하고 있던 때였다. 이를 통해 장영실과 측우기의 상관 관계가 만들어진 듯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현존 기록 만으로는 장영실이 측우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세종 시대의 다른 대표적인 과학 유물도 사정은 비슷하다. 측우기와 비슷하게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유물에는 해시계, 천문 관측에 쓰인 기기인 간의, 혼상, 혼의 등이 있다. 세종실록에는 '천문 의기를 만드는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대소간의, 혼의, 혼상, 앙부일구, 등의 기구를 모두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들도 장영실이 제작에 관여했으리라 추정되나 사료를 통해서는 이의기들을 장영실이 직접 단독으로 만들었는지 장영실이 속한 팀에서 함께 만들었는지 등이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장영실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분명히 남아있는 유물도 있다.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 자격루와 하루동안 해와 달의 운행을 알려주는 천문시계인 옥루가 그것이다. 보다 꼼꼼하게 역사 기록을 확인하고 기존의 신화를 정리해 나가야 장영실의 업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1442년(세종 24년) 3월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각종 기술 프로젝트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장영실에게 결정적 타격을 준 사건이 발생했다. 세종이 탄 가마가 부러지며 제작에 참여한 장영실이 탄핵돼 직첩을 회수당하고 곤장 80대를 맞고 쫓겨나게 된 것이다.
장영실에 관한 역사 기록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곤장의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리라 추정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중국으로 망명했으리라 상상하기도 한다. 모두 확인하기 어려운 추측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애초에 역사적 기록도 부족하고 비극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쫓겨난 장영실이 언제부터 왜 유명해진 것일까? 사실 장영실이 이처럼 상식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그의 이름이 한국사 연구에서 과학의 발전과 관련지어 언급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초반이었다.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까지 장영실에 대한 언급이나 주목은 거의 없었는데 이상백의 '한국사'(1962)와 이기백의 '한국사신론'(1963)에서 장영실이 언급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그러다 1966년 과학사학자 전상운이 쓴 '한국과학기술사'를 통해 장영실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그는 '관노였던 장영실'이라는 표현을 통해 장영실의 삶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인 장영실은 이때부터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 발전을 이끈 위인으로 바뀌어 해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영실의 역할을 상당히 강조하고 어느 면에서는 과장하는 이러한 역사적 서술은 좀 더 냉정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요즘에도 그러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과학기술 사업'은 홀홀단신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과학기술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관련 책임자들이 함께 작업을 해 나갔다. 대표적으로 세종은 천문학 진흥 사업을 추진하면서 문신 관료들과 기술자들을 모두 기용했다.
세종 시대의 가장 주요한 사업 중 하나였던 천문학 프로젝트에는 이순지, 김담, 정인지 등의 문신 관료들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문신들이 '칠정산' 등의 역법 정비 사업에 관여했다면 장영실 같은 기술자들은 물시계, 천문시계 등의 천문의기를 제작하는 데 몰두했다.
세종이 추진한 과학기술 프로젝트에 다양한 신분의 인원들이 참여했다는 점을 토대로 장영실을 다시 바라보자. 그러면 기존의 '홀로 수많은 과학 기구를 만든 천재 공학자 장영실' 대신 '세종이 진행한 과학기술 정책에 따라 기용된 근면성실한 장영실'이라는 새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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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11월호, [과학사 극장] 장영실의 초상화는 진짜 얼굴이 아니다?
[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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