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달력 걸어야 부자 된대” 귀한 몸 된 종이 달력
돈 되고 복이 온다?
진화하는 달력 풍수
경기도 고양의 회사원 배영현(42)씨는 최근 직장 앞 은행 영업점 7곳을 순례했다. 2025년 을사년 달력을 얻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해 12월 지인들에게 “2024년 은행 달력을 꼭 구해 집에 걸어두라”는 말을 들었지만, 신년 달력이 동나 못 구했다고 한다.
올해는 11월부터 나섰는데도 은행마다 “저희 고객 아니면 못 드린다” “이미 소진됐다”며 퇴짜를 놨다. 딱 한 곳에서 사소한 일거리를 만들어 창구 업무를 본 뒤 달력을 부탁하자, 직원이 “원래 이렇게는 안 드리는데…”라며 숨겨둔 탁상 달력 하나를 꺼내왔다고 한다.
연말을 앞두고 종이 달력 쟁탈전 시즌이 돌아왔다. 휴대폰에 달력 있는데 누가 종이 달력 보느냐고? 눈 침침한 분들에겐 날짜가 큼직하게 적혀 있고 메모도 할 수 있는 실물 달력이 필요하다.
젊은 층엔 종이 달력이 꼭 날짜 보려고 걸어두는 물건이 아니다. 돈이 되고 복이 들어오는 일종의 ‘풍수 소품’이다.
대표적인 게 은행과 증권사 등 금융권 달력이다. ‘돈 모이는 곳에서 만든 달력을 가정이나 매장에 걸어두면 재물이 들어온다’는 속설 때문.
황당하지만 틀린 말이라 할 수도 없다. 애초 현금 흐름이 활발해 은행 갈 일이 많은 부자가 은행 달력을 받아오는 법. 선후(先後)가 뒤바뀐 셈이다. 또 통상 은행 달력에 납세 기한이나 손 없는 날, 음력과 기념일 등이 표기돼 있어 재테크 스케줄을 짜기 좋은 것도 사실이다.
과거 달력은 은행의 고전적 판촉 방식이었다. 연말이면 말단 행원들이 달력 뭉치를 들고 주택과 상가를 누볐다. 한 번 걸린 달력은 1년 내내 홍보 효과를 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보급되며 달력 수요가 줄고, 은행들도 ESG 경영을 내세워 달력 발행을 크게 줄였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매년 부수를 3만~4만부씩 줄이는데도 원자재·인건비 상승 탓에 제작 비용은 1억원씩 늘어난다”고 했다. 종이를 아끼려 달력 크기도 점점 작아진다.
이처럼 은행 달력은 귀해지는데 재물운에 목숨 거는 사람은 많아졌다. 요즘 지역별 커뮤니티마다 20~40대 직장인과 주부 사이에선 어느 은행에서 언제부터 어떻게 해야 달력을 주는지 실시간 정보가 오간다.
달력 배부하는 날 아침부터 은행과 새마을금고 앞에 오픈런도 한다. “달력 거지”라고 자조하면서도 중요한 의식을 치른 듯 뿌듯해한다.
은행들로선 귀한 걸 막 나눠줄 순 없다. 우수 고객에게 PB룸에서 은밀히 건네거나 택배로 보내고, 일정액 이상 예치한 고객 혹은 모바일 앱 이벤트에 참여한 고객에게만 달력 신청 자격을 주고 추첨도 한다. 한 30대 주부는 “1억 모으기 목표를 세우고 은행 달력의 기운을 받으려 연말 특판 절세 상품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런 은행 달력들은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1만원 안팎에 거래된다. 가수 아이유를 모델로 세운 우리은행 탁상 달력 등은 인기가 많아 웃돈이 더 붙는다.
치킨·피자·커피 등 요식 업체와 유명 식당이 만든 달력도 인기다. 걸어두면 ‘먹을 복’이 생긴다고.
이 업계의 강자는 대전의 명물 빵집 성심당 달력이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판매 시즌에만 한정 수량 나눠주는 희귀템으로, 뒷장에 매달 무료로 받을 수 있는 빵 쿠폰이 붙어 있다. 중고 시장에서 2만원 안팎에 거래된다.
또 현대·신세계·롯데 백화점 VIP에게 주는 달력, 스타벅스나 포르셰 등 외국 브랜드에서 고객 사은품으로 주는 달력도 돈 주고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걸기만 해도 부의 과시와 신분 상승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절이나 교회 달력 역시 복을 비는 신도들에게 언제나 인기다.
병·의원이나 약국에서 나눠주는 달력엔 호불호가 갈린다. 일부 무속인이 “병원·약국 달력은 아플 일 생기니 줘도 받지 마라” 하는가 하면, “제약사 달력은 건강에 좋다”고도 한다.
“주류 회사 달력은 걸어두면 술 마실 일만 생겨 건강도 돈도 잃는다” “망한 회사 달력은 걸지 말라”는 말도 있다. 달력으로 날짜 보고 교과서 싸고 딱지 접던 시절엔 상상 못한, 21세기 달력의 쓰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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