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에 삼겹살 먹은 뒤의 기름 모아 비행기 날게 할 수도
곽재식의 세포에서 우주까지
등잔에 관한 한국의 옛 기록 중 인어 기름 이야기도 있다. 인어라고 하면 덴마크의 안데르센이 쓴 동화나 유럽의 인어 전설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텐데, 『어우야담』 『고운당필기』 등의 조선 시대 책들에도 전국 곳곳을 배경으로 하는 인어 전설이 실려 있다. 조선의 전설 속에서 인어는 해산물의 하나로 취급되는 일이 많았다. 유럽의 인어 전설처럼 신비한 마법과 연관되는 이야기보다는 “고기가 맛있다” “귀한 놈을 잡았다”는 식으로 사람을 닮은 희귀한 물고기를 잡았다는 류의 이야기들이 많다. “인어 고기의 기름을 짜면 고래 기름보다도 더 질이 좋다”는 설명도 간간이 등장한다. 전설 속 인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이 고래 기름을 아주 좋은 기름의 대표로 꼽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산골 사람이 부산서 횟집 차려 성공한 셈
아닌 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고래사냥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절, 사람들은 주로 고래를 잡아 그 기름을 짜 쓰기 위해 포경업에 종사했다. 특히 19세기 미국의 포경업은 한때 크게 번성했다. 허먼 멜빌의 명작 소설 『모비 딕』은 그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요즘이야 몇몇 지역에서 고래 고기가 별미로 팔리는 곳이 있다지만, 19세기 미국인들은 고래 기름을 짜내고 고기는 그냥 비료로 밭에 던져 버릴 정도였다.
들기름, 사슴 기름 정도를 사용하던 백제 시절만 해도 한국과 다른 나라 간의 기술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유럽, 미국 등의 선진국들과 조선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음은 기름 사용하는 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대양을 항해하며 먼바다에서 거대한 고래를 대량으로 잡아들여 사용하던 나라들과 그런 기술을 갖지 못한 조선의 격차는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한국인들은 좋은 기름을 확보하는 기술을 따라잡았다. 비록 한반도에서 석유가 생산되지는 않지만, 외국에서 수입한 석유를 가공·분리·정제해 휘발유·등유·중유와 같은 실제로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기술을 잘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석유 정유 시설 규모는 대체로 세계 5위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정유 산업은 굉장한 규모의 수출 산업이기도 하다. 많은 양의 석유를 수입하고 그것을 정제해 휘발유 등의 제품을 만들어 다시 외국에 수출하는 양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2023년 11월 국내의 한 정유 회사는 미국 서부 지역에 한국산 휘발유, 경유 등의 제품을 수출하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조금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강원도 산골에 살던 사람이 부산 자갈치 시장에 가서 횟집을 차렸는데 장사가 잘되더라는 것과 같은 얘기다.
한국 정유 회사들이 특히 뛰어난 경쟁력을 가진 품목은 항공유, 즉 비행기를 띄우기 위해 사용하는 기름이다. 2022년 기준, 한국 업체들의 항공유 점유율은 29%가량으로 세계 1위로 평가된다. 전 세계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쓰는 기름의 3분의 1 정도는 한국산이라는 뜻이다. 중동의 석유 재벌 만수르도 비행기를 탈 때는 한국산 항공유를 꽤 많이 쓰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를 과학기술적 상상력이라 부를만 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한국에서 많이 있는 것으로 사업을 해야 유리하다”는 정도의 생각에만 갇혀 있다면, 한국이 잘 할 수 있는 산업은 인삼 장사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기술에 투자해 세계 시장에서 통할 정도의 경쟁력을 갖추면 성공적인 사업이 될 것이라는 상상력의 힘으로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가 항공유 1위 국가가 되고 나아가 지금의 한국 산업을 일군 것 아닐까?
한국의 성장은 과거의 기술 선진국이던 미국이나 유럽 각국에서는 매우 부러워할 만한 일이다. 예를 들어 영국은 석유를 생산해 내는 나라지만 석유를 이용하는 공업은 한국에 뒤처진 부분이 여럿 있다. 노르웨이는 세계적인 석유 수출국이면서도, 그 석유를 활용하는 산업에서는 한국과 상당한 격차가 난다. 그러면, 이런 나라의 과학기술인들은 이런 상황을 그저 지켜 보고만 있을까?
비행기는 이산화탄소를 유독 많이 배출하는 운송 수단이다. 나는 예전에 기후변화에 대한 책을 쓰면서, 종이컵 하나를 만드는 데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와 한국에서 미국까지 한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갈 때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어림잡아 비교해 본 적이 있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어서 대략 1만 배가 넘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회용품을 안 쓰면 기후변화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을 한 번만 줄이면 평생 사용할 일회용 종이컵들을 다 합한 것만큼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자동차는 전기차를 도입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 볼 수 있다지만 대형 여객기를 배터리 무게를 감당하면서 전기로 날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비행기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그래서 버려지는 폐식용유나 동물성 기름, 식물에서 뽑아낸 재료 등을 다시 가공하여 비행기에 넣을 수 있는 정도의 기름을 만들어 쓴다는 발상이 나왔다. 그렇게 만든 기름을 지속가능 항공유, SAF라고 부른다. SAF 생산 기술에서는 유럽과 미국이 선두권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 항공유는 한국 업체들이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지만, 요즘 SAF 생산에서 세계 1위로 꼽히는 업체는 핀란드 회사다.
유럽 당국은 SAF 의무 사용 비율을 점점 더 높여갈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2025년은 2%이지만, 언젠가는 비행기에 들어가는 기름의 50%, 100%를 SAF를 써야 한다는 규제를 만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야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업체들을 견제하고 환경 기술에서 앞서 있는 유럽 회사들에 유리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쉽게 해 볼 수 있다. 당장 SAF를 2%씩 써야만 하는 한국 항공사들은 유럽산 SAF를 수입해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지난 8월에서야 국내 대형 항공사가 처음으로 국산 SAF를 사용하는 노선을 운영하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국 산업계가 기후 변화 시대에 필요한 미래의 기름을 만드는 기술에서는 조금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SAF는 한국이 한번 도전해 보기에 괜찮은 분야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석유가 생산되지 않는 한국에서 다른 방법으로 연료를 얻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그 자체로 득이 될만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세계적으로 분리수거 문화가 잘 발달한 한국인에게 유리한 사업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한국 식당마다 소주에 삼겹살을 먹고 난 뒤의 기름을 모아 비행기를 날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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