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상자산 규모 세계 2위인데…규제에 세금까지 발목
거대 자본 갖추고도 ‘외화 유출’ 걱정…업계 ‘씁쓸’
(시사저널=조문희 기자)
한국은 가상자산 시장의 대표적인 '큰손'이다. 한국 원화는 달러에 이어 비트코인을 가장 많이 거래하는 화폐다. 그래서 한국은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에서 세계 2위다.
그 수식어가 무색하게 국내 가상자산 업계에선 '사장(死藏)'을 우려한다. 우수한 기술력과 거대한 자본을 확보하고도, 규제 논의에 갇혀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당국은 투자자 보호를 외치며 뒤늦게 가상자산을 제도권에 편입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과세 체계도 확립하지 못한 채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원화로 거래된 비트코인, 전 세계 거래량 18%…한국이 일본보다 많아
11월27일 가상자산 통계분석 플랫폼인 코인힐스에 따르면, 지난 24시간 동안 전 세계에서 원화로 거래된 비트코인은 9198개다. 전 세계 거래량의 18%에 달했다. 54%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달러화에 이어 두 번째다. 3위 일본 엔화(14%)와는 4%포인트 차이, 유럽 유로화(7%)와는 11%포인트 차이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대금은 한국의 주식시장 규모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11월26일 기준 코스피·코스닥 양대 주식시장의 전체 거래대금은 15조4000억원이었다. 같은 시간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5개(업비트·빗썸·코빗·코인원·고팍스)의 24시간 거래대금은 121억5000만 달러, 약 17조원 규모다. 비트코인 가격이 10만 달러에 육박했던 11월22일 즈음에는 국내 가상자산 거래액이 30조원까지 치솟는 등 폭등세를 보였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는 원화 거래만 지원한다. 현행 특금법(특정금융거래정보법)에 따라 실명계좌 발급 확인서를 받은 거래소만 원화 거래를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원화 단일 시장인데도, 국내 거래소는 세계 대형 거래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국내시장 점유율 1위인 업비트는 지난해 7월 기준 코인베이스, 오케이엑스 등 해외 대형 거래소를 제치고 거래액 기준 세계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상장된 가상자산도, 지원하는 통화도 많은 해외 거래소보다 업비트에 투자금이 더 쏠린 것이다. 그만큼 한국의 가상자산 투자 수요가 많은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은 가상자산 시장에서 기술력을 갖춘 나라로도 꼽힌다. 지금은 실패했고 사기라는 오명까지 썼지만, 한국 토종 프로젝트였던 테라·루나는 2022년 총 예치자산이 200억 달러(27조원)에 달하며 이더리움(시가총액 2위 가상자산)의 대항마로 불렸다. 테라 프로젝트는 한때 한국의 가상자산 생태계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당시 카카오·위메이드 등 국내 유력 IT 기업도 저마다 블록체인 사업을 확대하며 시장 부흥을 이끌었다.
그러나 테라 사건 이후 국내 토종 프로젝트는 점차 설 곳을 잃어버린 분위기다. 프레스토 리서치가 지난 7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시가총액 상위 100위 가상자산 중 주목할 만한 한국 프로젝트는 한 개도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정민교 애널리스트는 "한국 내 가상자산 시장의 인기를 고려할 때 놀라운 일"이라며 "가장 큰 장애물은 웹3(블록체인 기술을 포괄하는 용어) 기술을 도박 수단으로 여기는 대중의 태도와 규제의 불확실성"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한국 가상자산 시장은 자본 유출을 우려해야 하는 실정이다. 가상자산 과세 논란이 대표적이다. 국내 거래소 관계자는 "지금도 해외 거래소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고 1년에 수십조원씩 해외시장으로 거래대금이 이동하고 있는데, 해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자금은 거의 없다"며 "국내 투자자에게만 세 부담을 늘리게 되면 자본 유출만 더 커지고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가상자산 과세가 시작되는 시기까지 불과 한 달 남았다. 이를 유예할지, 얼마나 공제할지 여부조차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여당은 가상자산 관련 제도가 아직 미비하다는 이유를 들어 법체계 정비 후 과세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가상자산 과세안은 기존 2021년 시행 예정이었다가 두 차례 유예됐다. 이를 다시 한번 미뤄 2027년부터 과세하자는 것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예정대로 과세하되, 공제 한도를 기존 25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늘리자는 입장이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대전제 아래 공제 한도를 대폭 늘려 고소득자로 범위를 한정하자는 것이다.
11월26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에서 가상자산 과세 유예와 관련해 합의안을 도출하고자 했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소위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과세안은 거대 양당 원내대표가 참석하는 '3+3 협의체'에서 최종 논의될 전망이다.
당초 양당은 2022년 대선 때부터 가상자산 관련 규제 완화책을 들고나온 바 있다.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는 800만 명 규모로, 이들의 표심을 공략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구체화된 것은 없다. 가상자산 과세 유예안부터, 가상자산을 기초자산으로 한 현물 상장지수펀드(ETF)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세계 각국, 부랴부랴 재평가 모드…한국만 "먼 얘기"
이는 글로벌 트렌드와도 배치된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기점으로 가상자산 관련 규제를 본격 완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상자산 규제를 선제 도입했던 일본에서도 기조 변화가 감지된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블록체인 기술을 적극 도입하겠다고 선언했고, 이에 맞춰 일본 금융 당국도 가상자산 ETF 도입 여부를 포함해 규제 재검토를 시작했다. 2021년 가상자산 거래와 채굴 등 관련 사업 활동을 전면 금지한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인민은행 통화정책위원회 전 위원인 황이핑 베이징대 경제학 교수는 "중국이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가상자산 재평가 움직임이 커질수록 글로벌 규제 완화 속도도 빨라질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열린 '업비트 D-컨퍼런스' 토론회에서 "정부가 2017년에 설정한 규제들이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다"며 "지금의 규제 방식은 한국 가상자산 시장의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 기존 규제를 완화하거나 대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상자산 규제 완화의 키를 쥔 금융 당국은 일단 선을 그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11월24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현재로서 가상자산 육성은 조금 먼 얘기"라며 "지금은 가상자산 시장을 기존 금융 시스템과 어떻게 연관시킬 것이냐, 그 과정에서 투자자 보호를 어떻게 할 것이냐가 우선이다. 정부로서는 불공정거래가 있는 게 아니냐에 중점을 두고 면밀히 감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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