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다단계·야반도주…도박판인지 미술판인지

노형석 기자 2024. 11. 2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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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시장 신뢰 붕괴 위기
픽사베이

“이 그림 5천만원 받고 팔았는데, 실제로는 얼마나 하나요? 찜찜해서요.”

서너달 전 서울 강남의 중견화랑 대표 ㅇ씨는 자신을 찾아온 보험설계사 출신의 한 미술품투자사 딜러한테서 이런 고백을 듣고 깜짝 놀랐다. 파는 딜러도 사는 고객도 미술품에 대해 모르다 보니 소속된 투자사에서 지시하는 대로 가격을 뻥튀기해 팔았다고 했다. 이렇게 판 뒤 임대 수익을 준다는 명목으로 다시 빌려 또 다른 사람한테 비싼 값에 팔거나 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작품의 가치와 값이 너무 차이가 난다는 감이 와서 죄책감이 느껴지더라고 했다. ㅇ 대표는 “너무 괴롭고 불안하다고 털어놓은 이 딜러는 최근 여러 미술품 투자 사기 사건이 잇따르면서 연락이 끊어졌다”고 전했다.

‘아사리판’이 된 최근 한국 미술시장의 단면이다. 미술품 값 뻥튀기해 속여 팔기, 돈 놓고 돈 먹는 다단계 판매 사기, 전시장에 빌려놓은 작품을 싣고 야반도주하기 등이 판친다. 보험·금융사 상품을 팔던 재무설계사 영업인들이 그림 장사에 뛰어들었다. 가치도 값도 모르는 그림을 기존 고객들에게 투자수익률만 내세워 거액에 판다. 그 뒤 다시 빌려 임대사업에 돌리고 이익의 상당 부분을 챙긴다. 영업사원들을 동원한 미술품거래회사 대표는 경기 악화로 원금 상환 등 뒷감당이 안 되자 국외로 도망쳤다.

갤러리케이에서 만든 아트테크 상품의 온라인 광고. 인터넷 갈무리

한국 작가들의 서구권 대형 전시와 프리즈, 키아프 등 아트페어 활성화로 내실을 차리는 듯했던 미술시장이 근본적인 신뢰 위기에 봉착했다. 요 몇년 새 미술시장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지면서 서울 강남권 화랑가를 중심으로 딜러들이 투자거래 업체를 운영하면서 미술품 담보 대여, 작품 조각투자 등을 주선했다. 그런데 최근 거품이 꺼지면서 원금과 수익을 투자자에게 돌려주지 않고 돈만 챙기고 잠적하거나 야반도주한 사례들이 잇따르고 있다. 경찰 수사와 소송이 줄을 잇는다.

지난 9월부터 투자자들의 고소와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로 윤곽이 드러난 미술품투자거래 업체 갤러리케이(K)의 투자 사기 행각이 대표적인 사례다. 2017년 창립한 갤러리케이는 고객이 구매한 미술품을 전시장 등의 대여 사업에 활용해 수익을 내는 사업모델을 취했다. 투자자들에게 빌린 작품의 원래 구매금액을 보장해주고 일정한 비율의 수익금 배분도 약속했으나, 실상은 잘 안 팔리는 작품들을 투자금 돌려막기를 통해 유통시킨 폰지 사기 형태인 것으로 드러났다.

갤러리케이는 고객 대면 영업에 능숙한 보험설계사·재무설계사를 동원해 투자수익만 강조하는 영업 방식으로 600억원 넘는 매출을 올려 국내 갤러리 상위권에 들었다. 가수 이현우, 배우 하정우가 나오는 홍보 동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관련 피해액만 1천억~2천억원대로 추산되고, 피해자들은 집단소송을 내거나 준비 중이다.

갤러리케이 투자 사기 사건에서 피해를 입은 작가들의 모임인 케이미술연대가 지난 10월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케이미술연대 제공

최근 대표가 구속된 서울 강남구 청담동 ㅁ갤러리의 경우도 지난 7년간 아트테크 사기 판매·대여를 일삼아 피해자 규모 1100여명, 피해액은 900억원을 넘었다. 미술품 전시, 임대, 간접광고 등 사업을 홍보하며 한국미술협회 가격확인서까지 부풀려 조작하면서 작품을 투자자들에게 판매한 뒤 대여하는 사업을 벌였으나, 새 투자금으로 앞선 투자자들의 수익금을 대주는 전형적인 폰지 사기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강남의 한 갤러리업체 대표는 “강남에 일반 전시장을 낸 신규 업자한테 작품 50여점을 빌려줬다가 이 업자가 밤에 이삿짐차 3대에 몽땅 싣고 야반도주하는 사건을 겪었다. 작품을 대부분 회수했지만, 가장 비싼 구사마 야요이 작품은 도주하면서 이미 처분된 터라 난감한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지난 10월 서울 마포경찰서에서 입건해 수사 중인 서울 마포구 ㅇ갤러리의 경우도 연간 12%의 미술품 임대료를 고정적으로 수령할 수 있다고 속이는 방식으로 투자자 200여명한테 50억원 이상의 피해를 입혔다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과거엔 작품 진위 공방이나 아트펀드 같은 투자상품을 놓고 유효성 논란이 일기는 했지만, 요즘처럼 미술에 문외한인 외부 금융 계통 업자들이 투자수익만 앞세워 시장을 교란한 일은 전례가 없다. 단기수익에만 집착하는 단발성 투자의 폐해와 딜러 등 시장 플레이어들에 대한 검증 시스템 미흡 등 여러 한계를 표출한 양상이다. 미술품 수집과 거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촉발하고 시장 신뢰도를 깎아먹는다는 점에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게 미술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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