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땐 엄격·모임땐 다정다감… 진정으로 한국 사랑한 스승[그립습니다]
미끄러지듯이 쓰고 계신 안경 너머 매서운 눈초리가 순식간에 밀어닥친다. 하긴 대학원생이 일본말도 제대로 못 하고 더군다나 일본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입학했으니 가르치는 교수님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뭔가 열심히는 하려고 하지만 좀 더 시간이 걸려야 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은 떨쳐버릴 수 없으셨던 것 같다.
결국 대학원 수업과 병행해서 학부 수업까지 듣도록 제안을 하셨다. 게다가 학부생의 제미(ゼミ·세미나)에도 동참하도록 했는데, 일본에서는 학부의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3학년부터 미리 지도교수를 배정받아 강의식 수업 외에 논문지도를 받기 위한 소그룹 모임으로 별도의 토론식 수업이 진행된다. 대학원생은 이미 소그룹이라 강의뿐만 아니라 발표를 비롯하여 날마다 엄청난 리포트 지옥에서 벗어나기 힘들 정도의 과제가 넘쳐나는데 학부 제미도 마찬가지로 상당한 사전 준비를 해야만 따라갈 수가 있다. 그러니 학부 수업과 제미, 그리고 대학원 수업과 논문지도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압박해 들어왔다.
그런 와중에 하교를 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 12시나 되어서야 숙소에 들어오니까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거의 날마다 밤샘을 해야 했다. 숙소 옆에 전철 건널목이 있는데 아침 첫 전철이 지날 때 ‘땡땡땡땡’ 하면서 차량 통행제한 소리가 들리면 날이 샌 것이다. 시계를 따로 볼 필요조차 없었다. 하루는 ‘공부하러 왔으니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지적이 떨어졌다. 그런데 지적만 하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슬그머니 장학금 수혜 대상자로 이름을 올려 주셨던 것이다. 성적 장학금이 아닌 외국인으로서 공부에 전념하도록 알선해 주셨는데도 아르바이트를 멈추지 못한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다행히 일본어 실력이 향상되어 수업은 물론 과제 준비나 발표까지도 자연스럽게 되니 점차 나름의 여유가 생기게 됐다.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흘러 이내 졸업논문 지도가 시작되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 정리된 논문 초안을 들고 교수님 댁으로 가서 한 문장씩 검토를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모님과도 정겨운 시간을 가질 수가 있게 되었다. 지금도 사모님과 특별한 관계가 유지되는 이유다. 그렇게 일 년을 반복해서 드디어 논문이 완성되었다. 논문을 지도하시면서 한국인 제자로 말미암아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을 수도 없이 내비치셨다. 급기야는 한국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하시는데 마치 교수님이 한국을 연구하시는데 내가 조교가 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무사히 졸업논문을 쓰고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교수님의 가정교사 같은 정밀한 지도 덕분이었다.
그 뒤로 업무차 일본을 방문할 때도 일부러 시골집에서 도쿄 시내까지 나오셔서 얼굴을 보여주신 사랑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아가 동문들과 함께 온천 여행까지도 동행시켜주시며 더없이 사제지간의 정을 돈독하게 만들어주셨다. 당연히 늘 사모님도 동행하셨다. 그런데 세월은 무심하게도 92세 되시던 해 그만 코로나19 기승에 편승하셨는지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뒤늦게 교수님의 서거 소식을 접했을 때는 이미 1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 매년 같은 제미카이(ゼミ會)에서 교수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교류회를 가졌는데 그것 역시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옛날이야기로만 듣던 정겨운 사제지간의 정도 그렇게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다행히 사모님과 아드님이 이후로도 제미카이에서 그 역할을 대신해서 이어주신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정감이 넘쳤고 특별히 나와 한국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교수님을 더없이 뵙고 싶다. 교수님이 그립습니다.
이랜드재단 이사 정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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