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코리아’ 제조업에 닥친 세가지 난관 [전문가 리포트]

한겨레 2024. 11. 28.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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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30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일대 모습. 연합뉴스

에이치디(HD)현대 글로벌 연구개발 센터(GRC)에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이 센터는 주력 산업인 조선, 로봇, 에너지, 건설기계 등을 담당하는 에이치디현대그룹의 연구개발(R&D) 기능을 모두 모은 건물로 2022년 완공됐다. 한국인의 평균 연령이 44.8살이고, 조선업을 포함한 중공업 분야는 평균연령이 더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건물에는 20~30대가 다수를 이루는 것으로 보였다.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캐주얼 복장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기계·조선공학 외에도 화학공학이나 컴퓨터공학 등 다양한 전공을 이수한 젊은 엔지니어들은 판교의 다른 아이티(IT) 회사 직원처럼 생활하며 ‘미래 먹거리’나, 주력 제품의 설계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생산을 담당하는 울산 동구나 거제에서는 인력난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다. 기술교육센터에도 생산 현장에도 사무실에도 작업복을 입은 중장년 남성 노동자들이 다수다. 청년들은 원청 정규직이 아니라면 더 이상 조선소를 찾지 않는다. 이주노동자들이 지난해부터 수천명씩 유입됐다.

배값이 오르고 지어야 할 배는 많지만, 일정 준수가 만만치 않다. 대졸 엔지니어들의 상당수는 최근 5년간 판교(삼성중공업, HD현대)나 시흥(한화오션)으로 이전배치됐다. 선박 건조 과정에서 설계 엔지니어는 현장의 작업자와 수시로 ‘면대면’ 소통을 해야할 일이 발생하지만, 조선 업체들은 온라인 소통의 한계나 출장 비용보다는 인재 확보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제조’를 50년 간 담당해온 동남권 지자체 3곳에서는 매년 3만명 가량의 청년유출이 벌어지고 있다. 비단 조선업 이야기만이 아니다. 수도권와 충청권은 대기업 연구소 뿐만 아니라 핵심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입지하며 제조업의 메카로 변화하고 있는데 반해, 동남권의 중소기업들은 첨단 제조업의 핵심 가치사슬에서 소외되며 연구개발 역량은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2022년 기준, 한국 제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28%, 고용의 17%를 담당한다. 수출의 83.5%가 제조업에서 나온다. 이익이 많이 남는 고부가가치 부문도 제조업에 있다. 제조업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나오고, 위기를 조명하며 대책을 촉구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재계는 최근 52시간제를 공격한다.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기업이 힘들고, 우수한 인재들 뽑아다가 써먹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 경제는 여전히 인재를 뽑아 ‘갈아 넣는 방식’으로만 생존이 가능한가. 공학자들도 의대 정원이 늘어 인재들을 모두 빼앗기게 생겼다고 말한다. 중국은 수백만명이 인공지능(AI)과 관련된 분야에 투입되고 있단다. 우수한 인재 확보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많은 직장인들이 ‘블라인드’ 등에 쏟아내고 있는 조직문화의 문제와 혁신을 함께 검토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지경학’(geoeconomics)을 언급하는 학자들은 미국·일본과의 동맹관계 강화, 러시아·중국과의 적절한 관계맺음, ‘신남방정책’의 적극적인 구현이 필요하다고 전한다. 한국 기업이 제품을 팔 곳, 제품을 만들 곳, 제품에 들어가는 소재·부품·장비를 공급하는 곳에 대해 관심을 갖는건 중요하고, 정치의 좋은 전략적 선택이 제조업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것은 지당하다. 그런데 이런 프레임은 제조업이 겪는 난관을 풀 실마리 자체는 외면하기 일쑤다.

새로운 논의를 위해 제조업 국가 한국이 봉착한 세 가지 난관을 제기해보고 싶다.

첫 번째는 인구학적 도전이다. 한국은 주력 제조업이 설정된 시기와 완벽하게 다른 학력구조를 갖고 있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가 시작되면서 철강, 조선, 기계, 전자, 화학, 비철금속공업을 전략산업으로 선정했고, 이들이 대체로 현재의 주력제조업이 됐다. 당시 대학 진학률은 10% 남짓이었다.

2000년을 지나 이제 80%가 대학에 진학한다. 고등교육을 받으면 기업에서 사무직, 연구직, 공학 엔지니어의 ‘지식노동자’의 역할을 기대한다. 그런데 ‘52시간제 철폐’를 말할 때의 대상은 중화학공업화 때부터 주력이었던 생산직 노동자들인 경우가 많다. 비수도권 제조업에서 생산직 인력난이 벌어지는 이유는 열악한 환경에 대한 기피일 때가 많다. 또한 여성 인력의 고학력화도 반영하지 않고 있다. 2000년대 중반이 지나면 대학은 남녀 동수가 됐고, 현재 대학생의 다수는 여학생이다. WISET(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의 기본계획은 2030년까지 이공계 여학생 비율 30%를 목표로 삼았다.

반면 제조 대기업의 이공계 여성 성비는 15% 수준이다. 비수도권 제조업 사업장은 거의 모든 이공계 직군에서 90% 이상 남성을 채용하고 있다. 제조업은 균등한 노동시장 참여를 바라는 고학력 스템(STEM·과학, 테크놀로지, 공학, 수학 분야 등을 한데 묶어 이르는 말) 전공 여성들을 배제한다. 비수도권에서 여성 인력 저활용이 인구 유출로 이어지고, 인구 유출로 지역의 혁신 역량이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수도권 사업장의 역량 축소까지도 이어질 수 있으나 제조업 혁신 담론 속에 여성의 위치는 없다.

두 번째는 공간분업의 도전이다. 우선 제조업의 구상 기능(제품 기획, 연구개발, 설계)이 수도권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1996년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가 완공됐고, 다른 기업도 이후 수도권 배치를 완료했다. 대기업의 경우 각각 수천억~수십조원의 인프라, 장비, 소프트웨어에 이미 투자한 상황에서 비수도권에 핵심 연구개발 기능이나 설계 기능을 신설할 가능성은 커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의 분업은 제조업의 실행(생산) 기능이 수도권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최근 경기 남부 지역에 제조업체들이 급격히 늘었다. 자동차, 반도체, 화학 분야 제조업체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구학적 난관과 구상 기능의 수도권 입지가 자석처럼 실행 기능까지 빨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의 2019년 신설 공장 배치는 공장도 수도권에 입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화시켰다. 생산 기능의 수도권과 충청권 입지는 용수와 전력 부족 문제까지 일으키지만 제조 대기업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최근엔 비수도권 이공계 학생들도 수도권에서 첫 번째 일자리를 찾는다.

인구학적 도전과 공간분업의 문제를 제조 대기업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내도, 세 번째로 언급할 기업 조직 내 조율이라는 조직론적 문제가 난관으로 작동한다. 인재를 갈아넣는 방식으로 문제가 안 풀리고 있다. 기업들은 전공별로 서로 다른 일하는 방식을 조율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다. 자동차 회사에서 친환경차 개발을 위해 화학공학 전공자를 다수 뽑은지 십수년이 지났다. 조선소에서도 조선공학·기계공학이 아닌, 화학공학·전기전자 전공자를 십수년전부터 채용하려고 혈안이다. 반도체회사는 반도체 설계(전자), 공정 설계(화학공학)를 중시하다 미세 공정 제어 때문에 기계 공학도를 많이 뽑게 됐다.

원래 전자회사의 핵심 기능은 반도체 설계에 있었고, 조선소의 핵심 기능은 생산계획에 있었고, 자동차 회사의 핵심 기능은 생산기술에 있었다. 한국의 산업화를 설명하는 개념 중 하나인 ‘조립형 공업화’(핫토리 타미오) 테제는, 선진국의 가공기계를 수입해다가 빠르게 공정을 자동화시키고, 모듈화를 통해 하청 체제를 잘 작동시키는 것이 1990년대 이후 한국 제조업의 특징이라 했었다. 이러한 생산방식은 도전받고 있다. 자동차(기계), 조선(조선해양), 반도체(전자)의 일하는 방식으로만 진행하기에는 그 전까지 각산업이 신경쓰지 않았던 배터리를 포함한 전장화, 에너지 정제 가공을 위한 물성의 고려, 수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설비의 제어라는 조건이 경쟁력의 핵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직 내 전공간 조율과 협업의 방식을 고안하는 게 피할 수 없는 난제가 됐다.

요컨대 한국 제조업은 이제 ‘추월차선’에 서 있으나, 제조대기업의 성공신화에 빠져 훈수만 두려는 상황이다. 제조업의 난관을 재정의하는 일은, ‘메이드 인 코리아’가 전환하기 위한 혁신연구의 기초작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

독자들에게 경제를 살펴보기 위한 지도책을 제안한다. 인구학적 전환, 공간분업의 전개, 탈추격기의 제조업 혁신이라는 3가지 난관을 함께 아우르는 지도책을 통해 단순히 신문에 나오는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 문제가 아닌, 우리의 삶과 연관된 문제로서 제조업의 현주소를 함께 살펴볼 수 있길 기대한다. 문화인류학과 과학기술학을 차례로 전공한 양승훈 교수는 대우조선해양에서 일했고, 현재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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