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 40년은 한국 발레의 살아있는 역사”
마린스키 정통성 이어온 자부심
40주년 대작 ‘라 바야데르’ 때
연출가 올레그 감동 눈물 흘려
98년 美공연 땐 벌벌 떨렸지만
성공적 무대로 K발레 해외 진출
전통 레퍼토리, 젊은 피 기용 등
한국 발레계 발전·혁신 이끌어
재정안정·전문 경영체제는 숙제

이곳의 간판 무용수로 시작해 지금은 최고경영자로서 모든 시간을 함께 해온 문훈숙 단장(61)의 증언이다. 한국 문화예술의 진가가 세계에 알려지기엔 아직 일렀던 1984년, ‘한국 발레 세계 정상을 향하여’라는 구호를 내걸고 유니버설발레단(UBC)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직업 발레단으로, 또 선화학교-발레단-극장 연계 시스템, 해외 진출 등으로 국내 발레계 최초의 역사를 써왔다. 올해 창단 40주년을 맞아 ‘로미오와 줄리엣’ ‘라 바야데르’ 등 대작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끈 문 단장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제 한국 발레는 세계가 인정하는 수준”이라고 말한다.
UBC가 지난 9월 6년 만에 선보인 ‘라 바야데르’ 무대는 그 증거로 대기에 손색없었다. 러시아 명문 마린스키 발레단 원작을 이어받아 출연진 150여 명, 의상 400여 벌에 달하는 호화롭고 웅장한 무대를 선사했다. 특히 3막 중 32명의 발레리나가 줄지어 아라베스크(한 다리로 선 채 다른 다리는 뒤로 들어 올리는 동작)를 이어가는 군무는 발레단의 탄탄한 기본기와 예술성을 드러냈다. 최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난 문 단장은 “민간 단체로서 이런 대작을 올리는 게 쉽진 않았다”며 “1999년 초연 때는 3막에 설 무용수가 부족해 러시아에서 데려와야 했다. 이번엔 UBC가 지도하는 국내 학생들과 인턴 단원들이 함께 완벽한 장면을 만들었다”고 돌아봤다.
“초연을 연출했던 올레그 비노그라프 전 UBC 예술감독께서 이번 리허설을 지켜보다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어요. 러시아 발레의 정통성을 지키고 가꿔준 것에 고맙다고 하셨죠. ‘관객이 발레 공연을 보고 나왔을 때 막 샤워를 한 것처럼 정화된 느낌을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늘 강조하신 분이세요. 지금 UBC의 비전인 ‘예천미지’(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와도 같은 뜻이죠.”
문 단장은 UBC가 국립발레단과 함께 국내 양대 발레단의 지위로 우뚝 서는 터닝 포인트로 비노그라프 감독과의 만남을 꼽는다. 그는 1992년 ‘백조의 호수’를 시작으로 1994년 ‘잠자는 숲속의 미녀’, 1997년 ‘돈키호테’ 등 대작을 잇달아 연출했다. “선생님께 먼저 ‘백조’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UBC는 수준 미달이다, 못 한다’고 하셨어요. 마린스키 출신 지도자라 눈이 높았던 거예요.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죠. 보통 신작 준비는 6주면 충분한데, 우리는 6개월을 연습에 매진했어요. 이후로 새 작품을 올릴 때마다 무용수 기량은 물론이고 의상 제작, 무대 장치 등의 수준이 계단 뛰어오르듯 발전했어요. 그때 만든 장치를 지금도 쓰고 있을 정도죠.”

UBC는 이후로도 ‘춘향’(2007) ‘코리아 이모션 정’(2021) 등 한국 정서를 담은 레퍼토리를 창작해왔다. 특히 ‘미리내길’은 UBC 소속 강미선의 지난해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으로도 이어졌다. 실력 위주의 젊은 피 수혈도 UBC가 이끈 한국 발레계 파격이었다. 문 단장은 1996년 갓 입단했던 발레리나 강예나에게 ‘백조의 호수’ 최연소 주역을 맡겼다. 서열을 중시했던 한국 조직 문화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나이나 위계보다 재능을 보고 기회를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나보다 예쁜 체격이 부러울지언정 공과 사는 구분했으니까요. (웃음)”
문 단장은 국내 발레 대중화의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요즘도 막이 오르기 전 무대 한편에 올라 줄거리와 발레 마임을 설명해주는 해설자로 활약한다. 본보기로 취하는 몸짓엔 여전히 기품이 흐른다. ‘영원한 지젤’로 회자하는 만큼 무대가 그리울 법도 하지만 그는 “벌벌 떨던 긴장감 때문에 무대나 박수갈채가 그립진 않다”고 했다. 그래도 “음악을 들으면 그냥 움직이고 표현하고 싶다”는 천상 무용수다.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수에서 이제는 발레단 전체를 건사하는 단장직에 오른 지 30년, 2001년 부상 이후 아예 토슈즈를 벗고 경영에 전념하면서 예술가적인 ‘혁신성’은 그의 무기가 됐다. 반대를 무릅쓰고도 최초의 역사를 써올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라고 자평한다. 문 단장은 “지금도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다”며 “조용필 같은 대중음악으로 발레를 만들어보고 싶고, 발레 뮤지컬도 다시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국공립과 민간 단체의 균형 발전을 위해 정부의 아주 작은 지원도 절실하다. 문 단장은 “요즘엔 유학을 가지 않고 한국 발레 교육을 택하는 영재들도 많아졌지만 이들이 국내에서 춤출 곳이 턱없이 부족하고 불안정하다는 게 문제”라며 “신생 단체뿐 아니라 중견으로 성장한 민간 발레단에도 문화적 수준과 기여도를 고려해 운영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현행 각종 창·제작 지원 사업이나 전문무용수지원센터 같은 정책은 선진적이지만, 인턴 인력 활동비 지원은 국공립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전언이다.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도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며 “중요한 건 작품을 보는 안목”이라고 강조했다. “마린스키 출신 감독이 보고 눈물 흘릴 정도로 ‘마린스키 전통’을 만들어놨으니 이걸 볼 줄 아는 단장이 와야 해요. 자칫 한눈 팔면 와르르 무너지는 게 발레라, 지금까지 만들어온 전통과 예술성을 이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15년 전 ‘딸 신월이 발레단 운영을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한 인터뷰가 남아있다는 얘기를 건네자 “옛날 얘기다. 이제 딸은 노래 부르며 음악 공부를 하고 있다. 본인이 행복하면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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