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지하철서 서서 가는 임산부: 아무나 앉는 '배려석'
2015년 시작한 임산부 배려석
서울시 ‘자리 비워두기’ 권장해
매년 7000건 민원 꾸준히 발생
임산부, ‘이동권’ 보호 받아야 해
특별한 시스템 도입한 지역 있어
부산시, ‘핑크라이트’ 대표적 사례
광주와 대전도 유사 시스템 구축
실제로 가시적 성과도 나고 있어
저출생 해결하겠다는정치권
대책 세우지 않은 채 입정치만
# 지하철 내 핑크색 좌석은 '임산부 배려석'이다. 서울시는 2015년부터 임산부가 좌석에 언제든지 편하게 앉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임산부 배려석을 도입하고, 비워둘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취지가 무색하게 임산부들의 불편은 끊이지 않고 있다.
# 그런데도 정부와 정치권은 어떤 정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툭하면 '저출생 위기를 해결하겠다'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정작 가까운 불편엔 귀를 닫고 있다는 거다.
"말을 꺼냈다가 서로 기분이 상하거나 괜히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그냥 가만히 서 있게 돼요(임신 6개월차 직장인 정소희씨)." "어머님들이나 비슷한 또래 여성분 외에는 양해를 잘 안 해주시는 거 같아요(임신 3개월차 직장인 이은주씨)."
지난 10월 시민 제안 플랫폼 '상상대로 서울'에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의 운영 방식을 개선해 달라는 글이 올라왔다. "임산부 배지, 휴대전화 앱 등 임산부라는 점을 인증할 수 있는 시스템에 태그를 완료한 후에만 좌석이 자동으로 활성화하도록 해야 한다." 글쓴이는 "현재 서울시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은 비임산부 승객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 임산부들이 좌석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라며 제안 이유를 설명했다.
이는 극소수의 목소리가 아니다.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발표한 '2023년 임산부 배려 인식 및 실천 수준' 조사 결과를 보면, 임산부 배려석을 이용해본 임산부 중 42.2%는 '이용이 쉽지 않다'고 응답했다. 그 이유로는 '일반인이 착석 후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서(65. 5%)'를 가장 많이 꼽았다.
그래서인지 관련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서울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에 접수된 임산부 배려석 관련 민원은 2022년 7334건, 2023년 7086건 등으로 연평균 7000건을 유지하고 있다. 월 민원이 600건 안팎인 셈이다. 올해 들어서도 10월까지 5194건이 접수됐다. 서울교통공사 측이 핑크색 객실의자를 칸당 2석씩 만들고 시인성視認性(모양이나 색이 눈에 쉽게 띄는 성질)을 강화하기 위해 엠블럼과 바닥표지까지 부착했지만 별 효용이 없었다는 거다.
왜일까. 답은 간단하다. '임산부 배려석을 임산부만 이용할 수 있도록' 강제할 만한 법적ㆍ제도적 틀이 없어서다. 지하철ㆍ버스의 임산부석에 비임산부가 앉았다고 해서 제재를 받는 게 아니니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럼 현실은 어떨까. 지난 19일 우리는 퇴근시간대인 오후 5~7시께 임산부 배려석의 운영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서울 지하철 5ㆍ6호선을 차례로 탑승했다. 간혹 비어있는 임산부석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임산부석엔 비임산부가 앉아 있었다.
임산부석에 앉아있던 중년 여성에게 임산부인지를 묻자 "아닌데요?"라며 "임산부가 오면 일어나겠다"고 말했다. [※참고: 서울 시내버스 상황은 더 열악했다. 버스 10대에 있는 임산부석엔 모두 비임산부들이 앉아 있었다.]
문제는 정부나 국회가 임산부 배려석의 취지를 살릴 만한 정책을 찾고 있느냐다. 고민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까지 관련 정책을 내놓거나 공론화의 장을 열어젖힌 적이 없다. 매년 저출생 위기를 언급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는 여야 정치권도 정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편엔 귀를 닫고 있다.
다만, 의미 있는 발걸음은 내디딘 지자체는 있다. 부산시와 광주시, 대전시다. 부산시는 2017년 1~4호선 전동차에 사물인터넷(IoT) 기반의 임산부 배려석 알리미 서비스 '핑크라이트(현재 576대)'를 도입했다. 미리 발급받은 비콘(발신기)을 소지한 임산부가 지하철에 탑승하면 임산부 배려석에 설치한 수신기에서 자리 양보를 권하는 불빛이 깜빡인다.
동시에 "불빛이 깜빡이면 가까이 있는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세요"란 음성이 나오면서 자리 양보를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한발 더 나아가 부산시는 지난 5월 핑크라이트 모바일 앱을 출시해 비콘 없이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했다.
광주시는 2022년 7월 임산부 배려석의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운영 체계는 부산시와 비슷하다. 임산부 배려석에 사람이 앉으면 "고객님께서는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셨습니다"란 음성이 나온다.
대전시도 같은해 12월 알림 시스템 '위드 베이비'를 도입했다. 대전시 관계자는 "'위드 베이비'를 도입한 후 임산부 배려석 관련 불편 민원이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관건은 세 지자체가 도입한 시스템을 서울에서도 도입할 수 있느냐다. 쉽지만은 않다. 예산, 강제 시스템을 향한 반발 등 살펴봐야 할 게 숱하다. 가령, 부산시는 '핑크라이트'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5억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유지비는 연간 5000만원가량 발생한다.
이런 이유로 서울교통공사는 난색을 표한다. 공사 관계자는 "서울은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운영 노선, 수송 인원 등이 훨씬 많기 때문에 설치비 및 유지보수 비용이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배려를 인위적으로 강요하면 세대ㆍ성별 간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면서 "시민 의식을 바꾸는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잡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나 국회, 지자체의 의지만 있으면 '못해낼 사업'도 아니다. 대전시는 임산부 배려석 알림 시스템 '위드 베이비'를 주민참여예산으로 제작했다. 광주시는 광주교통공사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연구모임에서 관련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부산시 역시 예산의 부담을 덜기 위해 대중교통시민기금을 활용했다.
광주교통공사 관계자는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문구와 음성 크기까지 시민 반응을 살펴가면서 관련 시스템을 순차적으로 확대했다"며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저출생 문제의 해법을 찾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예산 문제와 세대ㆍ성별 간 갈등이 우려스럽다면 '시범사업'을 통해 첫발을 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제갈현숙 한신대(사회복지학) 교수는 "임산부들이 대중교통수단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이동권'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면서 말을 이었다.
"기존 방식에 문제점이나 부족한 점이 보인다면 보완을 하는 게 맞는다. 다른 지역에서 효과를 보고 있는 '모범 사례'를 서울시가 반영해 보는 거다. 예산 문제, 비임산부와의 갈등이 걸린다면 가장 민원이 많이 접수된 구간이나 노선을 중심으로 시범사업을 펼쳐 효과를 비교해 보는 방법도 있다. 시범사업 전후를 비교했을 때 유의미하다고 여겨지면 확대 적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하나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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