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끝난 이야기’의 속편이 필요했던 이유 [비장의 무비]

김세윤 2024. 11. 27.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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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디에이터 2〉
감독 : 리들리 스콧
출연 : 코니 닐슨, 폴 메스칼, 덴절 워싱턴

“어느 날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검투사에 대한 영화인데, 해볼래요?’ 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치마 입은 남자들 말이에요?’ (···) 사실 처음에는 무시했습니다. 이런 영화까지 맡아야 하나 싶었습니다(〈스코어 오리지널 인터뷰집:영화음악의 모든 것〉 중 한스 짐머 인터뷰 인용).”

한스 짐머가 ‘이런 영화까지 맡아야 하나’ 싶어 한숨을 쉬었다는 작품이 나중에 〈글래디에이터〉(2000)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아카데미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5개 부문을 수상하고 〈미션 임파서블 2〉에 이어 그해 두 번째로 돈을 많이 번 할리우드 영화가 되었다. 그런 영화를 처음에는 무시했던 이유가 뭘까.

〈벤허〉(1959)와 〈스파르타쿠스〉(1960)를 정점으로 할리우드의 ‘검투사 영화’는 꾸준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1980년대,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코난 더 바바리안〉(1982) 같은 영화가 흥행하면서 치마 입은 근육질 남자들의 “검과 샌들 영화(sword-and-sandals)”가 다시 쏟아져 나왔지만, 대부분 저예산 영화였고 얄팍한 아류작도 적지 않았다.

‘이런 영화까지?’ 하면서 고개를 저을 때 한스 짐머가 떠올린 건 바로 ‘그런 영화’였을 것이다. 그 시절 할리우드는 가까운 과거(〈포레스트 검프〉 〈타이타닉〉)나 먼 미래(〈터미네이터 2〉 〈매트릭스〉)에 더 관심이 많았다. 고대 로마는 잊혀버린 시대였고 검투사 영화는 한물간 장르였다. 〈글래디에이터〉가 나오기 전까지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답은 이랬습니다. ‘그런 유의 검투사 영화는 아니에요.’ 그 말에 바로 앉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한 시간가량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끝내자 아내가 묻더군요. ‘이번엔 무슨 영화래?’ ‘아, 검투사 영화래.’ 그러자 아내가 그러더군요. ‘아, 남자들이란!’(같은 책 인용)”

그때 한스 짐머는 결심했다. “절대 뻔한 영화는 만들지 말자”라고. “아, 남자들이란!”이라는 반응이 나올 게 분명한 장르지만, “리들리 스콧이 얼마나 훌륭한 예술가이자 시인인지, 그가 시적인 작품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내심 믿는 구석도 있었다. 장군에서 노예로, 다시 검투사로, 그리고 마침내 영웅으로 숨을 거두는 막시무스의 일대기. 〈글래디에이터〉는 과연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였고 동시에 애틋한 서정시이기도 했다.

“내 이름은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리디우스.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펠릭스 군단의 군단장이었으며 진정한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충복이었다. 살해당한 아들의 아버지이며 살해당한 아내의 남편이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이 생에서 안 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코모두스 황제(와킨 피닉스) 앞에서 막시무스(러셀 크로)가 당당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관객은 전율했다. 밀밭을 지나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는 그의 마지막 환상에 함께 눈물 흘렸다. 실제 숲 하나를 통째로 불태우며 찍은 전투 장면과 실제 호랑이 다섯 마리를 데려와 찍은 검투 장면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한물간 장르에 그렇게 다시 물이 들어왔다. 감독들은 열심히 노를 저었고 스타들은 앞다투어 치마를 입었다. 〈트로이〉와 〈알렉산더〉를 시작으로 〈300〉과 〈킹덤 오브 헤븐〉을 지나 드라마 〈왕좌의 게임〉과 〈스파르타쿠스〉에 이르기까지. 고대 검투사와 중세 기사, 판타지 시대극의 새로운 전성기는 결국, 21세기의 첫해 〈글래디에이터〉가 열어준 것이었다.

“러셀 크로는 자신이 출연할 수 있는 속편을 원했다. 평소 친분이 있던 가수이자 작가 닉 케이브에게 시나리오를 부탁했다. ‘근데 당신은 1편에서 죽지 않았나요?’ 케이브가 묻자 크로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문제를 당신이 해결해야지.’(BBC 기사 ‘Gladiator 2: The strangest sequel never made?’ 인용)”

막시무스가 눈을 뜬 곳은 사후세계. 천국이 아니라 연옥. 결국 신과 거래를 한다. 지상에 다시 내려가 어떤 임무를 완수하면 죽은 아내와 아들을 다시 만나 천국에서 살 수 있다는 약속을 믿고 환생한다. 하지만 어찌어찌하다 영원히 죽지 않는 저주에 걸리고 십자군전쟁과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에 모두 참전하며 끝없이 손에 피를 묻히다가 결국 현재의 미국 국방부 청사에 들어가 있는 막시무스를 보여주며 막을 내리는데···.

다행히(?) 이 아이디어는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닉 케이브 역시 “〈글래디에이터〉의 속편은 절대 만들어지지 않을 걸 알았기에 그냥 내 맘대로 신나게 써봤다“라고 고백했다. 주인공이 죽었고 메인 빌런도 죽었으니까. 복수는 끝났고 더는 남은 원한도 없으니까. 막시무스가 나오는 속편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사이 러셀 크로는 환갑을 맞이했다.

점점 더 대담하게 국정을 농단하다

어떤 이야기가 더 가능할까? ‘다 끝난 이야기’의 속편이 필요한 이유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리들리 스콧은 1편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답을 찾았다. 비정한 콜로세움 한복판 막시무스와 코모두스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생존자들. ‘영웅의 희생’과 ‘권력의 몰락’을 동시에 목격한 두 사람. 코모두스의 누나 루실라(코니 닐슨)와 그녀의 아들 루시우스(폴 메스칼)가 속편을 이끈다. 1편에서 15년이 흐른 뒤의 로마가 배경이다.

“〈글래디에이터 2〉는 특정 시대를 다루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로마 제국이지만 인류가 절대로 깨우치지 못하는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역사를 반복하니까요(〈글래디에이터 2〉 프로덕션 노트, 리들리 스콧 인터뷰 인용).”

그래서 영화도 다시 한번 이야기를 반복한다. 코모두스의 폭정을 겪고도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로 인해 한층 더 가혹한 폭정에 시달리는 로마. 군인에서 노예로, 다시 검투사로, 그리고 마침내 영웅이 되는 주인공 루시우스. ‘아는 맛’으로 흘러가는 속편의 이야기에서 ‘다른 맛’으로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마크리누스(덴절 워싱턴)다.

노예 출신이지만 자수성가로 부자가 된 그는, “돈으로 로마의 중심부까지 들어”간 “매우 현대적인 인물”이다. “황제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황제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그가 점점 더 대담하게 국정을 농단하는 이야기다. 재력 앞에 권력이 머리를 조아리는 시대, 마크리누스가 영화에서 인용한 키케로의 이 한마디가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도는 영화다. “노예가 원하는 건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노예를 부리는 것이다.”

24년 만에 다시 만난 ‘글래디에이터’는 다시 한번 승리하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승리에 가려진 ‘반복되는 패배’의 이야기였다. 그 옛날 막시무스에 열광했던 청년 관객들은 이제 마크리누스에게 휘둘리는 중년 관객으로 속편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모두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화 속 영웅’이 각자의 노예를 부리고 싶은 ‘내 안의 욕망’과 벌이는 검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다 끝난 이야기’의 속편이 필요했던 이유를, 나는 마크리누스에서 찾았다.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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