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에 생활고까지… 하루하루가 ‘고통’ [병들어버린 남한의 봄 上]
여성질환 발병률, 한국 여성의 2배 ↑...진료비 부담·잘못된 인식에 병원 못가
道 의료지원 전무… 내년에 계획 중 실태조사 후 장기적 치료 체계 필요
이런 상황에서 누구보다 긴장 속에 살며, 소외돼 가는 이들이 있다. 1997년 공식적으로 우리 정부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북한이탈주민’이다. 현재까지 국내에 들어온 북한이탈주민은 3만4천183명. 그중 32.8%에 달하는 1만1천241명은 경기도에 산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이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각종 정책을 내놓았지만, 그들에게 남한 사회는 27년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건강하게 사는 삶,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 그 희망을 바탕으로 하는 행복. 북한이탈주민에겐 먼 얘기와도 같은 ‘인간답게 살 권리’. 경기일보 경기알파팀은 그동안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그들의 건강한 삶을 위한 이야기를 담아봤다. 편집자주
“사는 게 먼저였어요. 아파도 일단 살아야 하니까, 병원에 갈 생각 같은 건 해보지도 못했죠.”
2007년, 죽음의 공포를 넘어 북한을 탈출한 박하나씨(53·가명·여성)는 탈북 17년, 국내 정착 11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병을 알았다.
매일을 숨죽여야 했던 삶, 살기 위해 일상의 모든 걸 포기했던 나날, 아픈 몸이 당연했던 일상. 그렇게 ‘사는’게 아닌 ‘살아내야’ 했던 박씨에게 병원은 단 한번, 머릿속에 담아본 적 없는 먼 얘기였다.
박씨는 북한을 떠나 팔려가듯 중국으로 가 중국인 남성과 결혼했다. 악몽같았지만, 견뎌내야 했던 날들이 펼쳐졌다. 집안일은 당연하게 그녀의 몫이었고, 출산을 강요하는 남편으로 인해 2008년 아이를 낳았다. 출산 직후 몸을 추스를 틈도 없이 또다시 생업에 던져졌다. 몸 곳곳이 아파왔지만, 그게 당연하다 여겼다.
한국에 온 뒤에도 삶은 순탄치 않았다. 2013년 당시 정착지원금 300만원과 함께 사회에 던져진 박씨는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식당 일을 전전했다. 하지만 잔병치레가 심한 데다 자꾸 지치는 탓에 어느 곳에서도 1년 이상 일할 수 없었다.
계속되는 복통으로 올해 4월 처음 병원을 가본 박씨는 그제야 자궁경부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한국에 정착한지 5년이 지났고 일을 했다는 이유로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기초생활수급비 70만원 뿐인 그가 500만원의 수술비를 감당하기란 불가능했다. 수술비를 마련하는 데 6개월이 걸렸다. 돈을 모으는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지인에게 빌린 돈으로 겨우 수술을 해 한 차례 고비를 넘겼지만 아직 완치까지 갈 길이 멀기만 하다.
박씨는 “당장 먹고 살 돈도 없는데, 매번 수십만원이나 하는 치료비를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경기도는 물론 전국적으로 북한이탈주민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70%를 넘어선다. 경기도내 북한이탈주민 1만1천241명 중 여성은 8천353명이다.
여성 북한이탈주민이 탈북 과정에서 더 많은 질병을 얻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현실과 맥을 같이 한다. 탈북민들은 1990년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오던 탈북 방식이 현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말한다. 북한 역시 수많은 탈북민을 겪으며 경계 태세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이에 대부분 중국 등 제3국을 통한 탈북이 이뤄진다. 결국 국경을 넘나드는 게 보다 자유로운 여성이 탈북의 성공률도 높아지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탈북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만나게 된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인신매매, 원치 않았던 결혼과 출산 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북한이탈여성들의 건강을 위협한다. 그리고 이 같은 위협은 국내에 온 뒤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진료를 받고, 탈북 과정에서 얻은 질병을 치료하기에는 관련 제도가 미흡해서다.
■ 탈북 여성이기에 겪는 ‘건강 적신호’
여성 북한이탈주민들은 2000년대부터 제3국을 통해 국내로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게 브로커다. 브로커를 통해 제3국으로 간 뒤 그곳에서 현지인과 동거 또는 결혼을 해 수년간 체류하는 게 일반적이다. 탈북 사실이 노출되면 강제 북송될 위험이 있어 현지인 남성과 가정을 이뤄 숨는 셈이다.
이때 여성 북한이탈주민들은 임신과 출산, 유산 등의 과정을 겪는다.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도 수두룩할 뿐 아니라 성적 학대와 폭행 등을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탈북 과정은 여성 북한이탈주민의 ‘여성질환 발병률’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행 연구조정실(정승호 인천대 부교수, 위혜승 국민건강보험공단 연구위원, 이종민 한국은행 북한경제연구실 연구위원)이 지난해 발간한 ‘북한이탈주민의 건강과 경제적 적응에 대한 연구 : 국민건강 정보DB 분석을 중심으로’ 연구보고서를 살펴보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여성 북한이탈주민(1만1천681명)의 여성 생식기계 질환 및 장애로 인한 의료 이용률은 34.91%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 여성(35만1천566명)의 경우 15.46%만이 여성 생식기계 질환 및 장애로 인해 의료 서비스를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 북한이탈주민이 두 배 이상 많은 여성 질환에 시달린다는 얘기다.
또한 이들은 한국에 온 뒤 3년, 6년, 9년이 지나도록 자궁경부의 염증성 질환으로 가장 많은 외래 진료를 받았다. 탈북 과정에서 얻은 생식기 질환이 한국에 정착한 뒤에도 상당기간 계속되는 셈이다.
이에 대해 이광미 국립암센터 평화의료센터 팀장은 “북한이탈주민 중 여성은 북한에서의 영양실조, 인신매매 등으로 인해 자궁암, 유방암 등 여성 질환에 걸리기 쉽다”며 “북한에서의 건강 행태 등에 대한 것을 조사한 뒤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 건강 지원 사각지대, 탈북 여성
전국의 탈북민 3명 중 1명은 경기도에 살고, 10명 중 7명 이상이 여성 임에도 여성 북한이탈주민의 건강한 삶을 지원하는 의료 지원 체계는 사실상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도내 여성 북한이탈주민 8천353명 중 건강보험에 가입한 여성은 5천950명이다. 나머지 2천403명은 의료급여 자격을 부여 받았다. 의료급여 제도는 생활 유지 능력이 없고 건강보험에 가입할 형편이 안되는 국민을 위한 제도다.
의료급여 대상자는 진료비나 치료비를 지출한 뒤 이를 국가에 청구하면 전액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 수익이 없어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고 북한에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여성 북한이탈주민들이 스스로 병원 치료를 택하기란 쉽지 않다.
이 뿐 아니라 건강보험에 가입한 여성 북한이탈주민이라 하더라도 같은 문제가 생긴다. 생활이 어려워도 수익이 있다는 이유로 의료비 지원 체계에서 제외돼 오히려 이들에게 의료 사각지대가 발생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북한이탈주민의 사회 정착을 돕는 유일한 공공기관 ‘남북하나재단’도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의료비 지원 사업을 하고 있지만, 조건이 까다롭다. 기준중위소득 75% 이하이면서 민간보험에서 단 1원의 치료비도 지원 받지 못해야 하는 것은 물론 입원이나 진료 등 본인부담금이 10만원 이상 발생한 경우 등 모든 조건을 충족했을 때만 진료비를 지원 받을 수 있다.
이마저도 1년 2회, 최대 300만원 이내에서만 지원 받을 수 있는 실정이다. 현재 여성 북한이탈주민이 생식기 질환을 가장 많이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개월 이상의 꾸준한 치료는 물론 비싼 진료비가 수반되는 만큼 사실상 실질적 도움을 주긴 어렵다는 얘기다.
경기알파팀이 만난 도내 여성 북한이탈주민들 역시 병원에 가 치료를 받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부분 비용을 꼽았다. 2007년 탈북한 유혜진씨(53·가명)는 “자궁암에 걸려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일은 다니지만 수입이 많지 않아 당장의 생활비도 버거운데, 한 번에 수십만원이 드는 치료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어 그저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이런 데도 전국에서 북한이탈주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경기도는 이들과 관련한 의료 지원 체계가 전무하다. 경기도 관계자는 “아직까지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의료 지원은 없다”면서도 “내년에 북한이탈주민에게 의료비를 지원하는 사업을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 탈북민 여성 치료, 장기적인 시각으로 지원해야
전문가들은 여성 북한이탈주민의 경우 북한이나 제3국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병원 치료를 받지 못했던 만큼 국내에서 장기적 치료를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봤다. 결국 이들이 국내에 안정적으로 정착해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질병의 특성을 분석한 뒤 장기적인 시각으로 지원하는 의료 시스템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남영화 미래한반도여성협회 대표는 “북한이탈주민의 건강 상태는 전반적으로 한국 사람들보다 좋지 않다. 어린시절부터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지 못하고 그저 배만 채우기 급급했기 때문”이라며 “질병에 쉽게 노출돼 있으며 면역력이 낮기 때문에 병에 걸려도 한 번의 치료로 쉽게 나을 수 없다”고 전제했다.
남 대표는 여성 북한이탈주민들이 어떤 질환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한 뒤 실질적으로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욱이 여성 북한이탈주민은 탈북 과정에서 인신매매를 당하고 이로 인한 생식기 질환을 가지게 되는데 성적 학대, 반복되는 임신과 출산으로 몸이 많이 약한 상태”라며 “현재 의료비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이는 기초생활수급자가 우선이 될 수밖에 없어 일을 한다는 이유로 치료가 시급한 병에 걸렸을 때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이탈주민이 어떤 질환을 앓고 있는지, 왜 병을 앓게 됐는지 등에 대한 명확한 조사를 한 뒤 실질적으로 꾸준히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성은 경기서북부하나센터 사무국장 역시 “여성 북한이탈주민은 탈북 과정에서 제3국을 거치면서 출산 경험을 갖게 되지만 필요한 시기에 치료 받지 못해 여성 질환에 노출돼 있다”며 “현재 의료급여를 받고 있지만 기초수급생활대상자가 우선이기 때문에 수입이 적지도 많지도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각지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처음에 일시적인 병으로 시작해 치료를 받지 못해 장기적인 병으로 발전하기도 한다”며 “하지만 치료비와 간병비가 부담이고 지원 역시 한정적이기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특성을 고려한 의료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건강검진 등 의료서비스에 익숙하지 않은 여성 북한이탈주민들이 스스로, 걱정 없이 병원을 찾을 수 있도록 할 인식 변화 교육도 필요하다고 했다.
윤 교수는 “여성 북한이탈주민은 북한에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거나 부실한 의료체계에 있었고, 제3국에선 불법체류자의 신분이기 때문에 제대로 건강을 돌보지 못한다”며 “출산과 육아로 인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재된 건강상의 문제를 한국에 입국해 진료를 받은 뒤 알게 되는 것인데 북한에서는 병이 있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이들 스스로가 병원에 가지 않으려고 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루 빨리 자신의 건강을 검진하고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건강 인식을 바꿔줄 제도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경기α팀
※ 경기α팀 : 경기알파팀은 그리스 문자의 처음을 나타내는 알파의 뜻처럼 최전방에서 이슈 속에 담긴 첫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
김경희 기자 gaeng2da@kyeonggi.com
김은진 기자 kimej@kyeonggi.com
박채령 기자 cha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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