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액 주주 보호 YES, 상법 개정 NO… 개미 답답하게 하는 금융당국
투자자 기대감 컸지만 감감무소식
금융위원장 이어 금감원장도 말 바꿔
“기업 의사결정 지연 부작용 고려해야”
“소액 주주 이익 제고를 위한 상법 개정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올해 1월 2일 한국거래소를 찾은 윤석열 대통령은 일반 주주의 이익 침해를 방지하는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상법 개정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10개월이 흐른 현재 윤 대통령의 이 약속은 공허한 외침으로 전락했다. 기업 반발이 극심한 데다 제도 개선을 주도해야 할 정부 부처마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다. 상법을 개정하면 기업의 의사 결정이 지연될 것이라는 하소연에 힘이 실린 것이다.
상법 개정의 골자는 이사가 충실해야 할 대상을 현행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주무 부처 중 한 곳인 금융위원회는 사실상 상법 개정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냈다.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했던 금융감독원 역시 태도를 바꿔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 기업 경영 판단이라지만… 투자자 공감 못 얻는 분할·인수·합병
2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빙그레는 내년 5월 아이스크림 등 음식료품 생산과 판매를 담당하는 사업 회사를 인적분할(기존 회사 지분만큼 신설 법인 주식 소유)하고 지주 회사 체제로 전환한다.
빙그레의 인적분할은 앞서 시장에 충격을 줬던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과는 다르다. 하지만 빙그레 주가는 공시 이후 25일 4.66% 내렸고, 26일에도 약세 흐름이 이어졌다. 지주회사 전환이 빙그레 전체의 가치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면에서 우려를 제기하는 것이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이사(변호사)는 “빙그레가 지주회사로 전환하면 중복 상장에 따른 지주사 주가 하락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주주에겐 아무런 이익이 없는데 대주주가 (상속에 따른) 절세하기 위해 구조 개편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고 했다.
일반 주주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기업 의사결정 사례는 빙그레뿐만이 아니다. 효성티앤씨는 최근 효성화학으로부터 특수가스 사업부에 대한 인수의향질의서를 수령해 내부 검토 중이다. 효성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효성티앤씨가 같은 그룹사인 효성화학의 사업 일부를 사는 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건데, 일각에선 웃돈을 지급하고 인수하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효성화학이 당장 갚아야 할 부채가 산적해서다.
올해 7월 효성화학은 특수가스 사업부 매각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스틱·IMM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이후 양측은 매각가를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가격을 두고 양측의 눈높이 차이는 아주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효성티앤씨는 “(효성화학 특수가스 사업부 인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되는 시점이나 한 달 내에 (관련 내용을) 공시하겠다”고 밝혔다.
또 두산그룹은 다음 달 주주총회에서 안건이 통과되는 대로 두산밥캣을 두산에너빌리티의 자회사에서 두산로보틱스의 자회사로 변경할 계획이다. 앞선 7월 이런 내용의 자회사 개편안이 발표되자 두산에너빌리티 주주들의 반발이 일었다. 투자자로선 매년 1조원씩 버는 알짜 회사인 두산밥캣을 잃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정리로 대주주가 두산밥캣에 대한 지배력이 3배 높아지는 점은 투자자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두산그룹은 최종적으로 두산밥캣을 상장폐지하고 두산로보틱스가 이를 흡수하는 안은 철회했으나 언제 다시 진행될지 모르는 게 현실이다.
◇ 금융위, 상법 개정안에 사실상 반대… 금감원도 동조
올해 1월 2일 윤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 중 최초로 한국거래소 증시 개장식에 참석했다. 대통령이 나서서 자본시장을 챙기니 업계에선 ‘말만 했던 과거 정부와는 다르다’는 기대가 번졌다. 하지만 연말이 된 지금 금융당국은 상법 개정에 뒷짐을 지고 있다.
재계의 거센 반발 때문으로 해석된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지난 24일 KBS 일요진단 라이브 방송에 출연해 “기업 지배구조가 보다 투명하게 가야겠다는 데 동의한다”면서도 “그 방법이 상법 개정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선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상법 개정에 사실상 반대 의견을 낸 것이다.
김 위원장은 “(상법 개정이) 기업 경영이나 자본시장에 미칠 부정적 영향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이사가 회사에 대해 충실의무를 다하도록 돼 있는데, 주주까지 포함하면 의사결정이 지연될 수 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상법 개정보다 합병, 분할 등 문제가 있었던 부분을 그때그때 손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금융위의 산하 기관인 금감원도 비슷한 노선을 밟고 있다. 올해 6월까지만 해도 금감원은 상법 개정에 찬성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당시 상법 개정 이슈 관련 긴급 브리핑을 열고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로 하는 건)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법 개정을 공론장에 올린 것이다.
그러나 5개월 만에 금감원은 금융위와 같은 목소리를 냈다. 이 원장은 이달 13일 ‘인베스트 K-파이낸스: 홍콩 투자설명회(IR) 2024′가 끝난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상법 개정 등) 정부와 금융당국은 여러 버전의 컨틴전시 플랜(상황별 대응계획)을 갖고 있다”며 “무엇이 정답인지는 시장과 소통하면서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상법 개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약속한 상법 개정을 외면하려는 정부 부처에 투자자들은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한 투자자는 “대주주의 횡포가 오죽 심했으면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까지 넓히자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겠느냐”고 했다. 또 다른 투자자는 “회사 주인은 주주인데, 회사가 주주에게 그간 잘했다면 상법 개정을 하자고 했겠냐”고도 했다.
상법 개정안이 실현될 경우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는 소송이 남발하고 국내 기업이 해외 투기 자본으로부터 공격받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경협은 “(개정안은) 이사회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어렵게 한다”며 “신성장 동력 발굴을 저해해 기업과 국내 증시의 밸류다운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본시장 일각에서도 재계 주장에 동의하는 움직임이 있다. 한 증권업계 고위 관계자는 “2018년 CJ제일제당이 미국 슈완스를 인수할 때도 ‘냉동식품 회사를 2조원에 매수하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소액주주들이 반발하고 일부 기관이 레터를 발송하는 일이 있었다”면서 “부정적인 여론이 압도적이었기에 요즘 같았으면 취소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다”고 말했다.
다만 대부분은 상법 개정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계 관계자는 상법 개정이 당장 기업 관행을 대대적으로 바꾸는 특효약은 아니지만 자본시장의 발전을 위해 생각해 볼 만한 정책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상법이 개정되면) 이사들이 주주의 이익을 현재보다 더 고려해서 의사결정을 내리라는 일종의 선언적인 의미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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