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묵언]김진숙, 그가 다시 길 위에 섰다

기자 2024. 11. 2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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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백기완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 여섯 글자를 썼다. “김진숙 힘내라.” 앞으로는 노동자가 억울하게 죽는 일, 해고되는 일은 없게 하라는 마지막 당부였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당시 그는 암과 싸우면서도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34일 동안 도보행진을 했다. 공권력에 의한 불법연행과 폭력을 인정하고 부당한 해고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실로 피맺힌 호소였다. 그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또 다른 김진숙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 대신 공돌이, 공순이로 살아야 했던 노동자, 그들에게 가해졌던 학대와 착취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를 요구했다. 수백명의 시민과 노동자가 함께 걸었고, 언론은 그의 행적을 비상하게 추적했다. 도보행진을 마치고 김진숙은 청와대를 향해 외쳤다.

“전두환 정권에서 해고된 김진숙은 왜 36년째 해고자인가. 그 대답을 듣고 싶어 34일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약속들이 왜 지켜지지 않는지 묻고 싶어 한 발 한 발 천리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36년 동안 나는 유령이었습니다. 자본에게 권력에게만 보이지 않는 유령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내가 보이십니까? 함께 싸워왔던 당신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여전히 해고자인 내가 보이십니까?”

그럼에도 권부에 있던 자들은 눈을 감았다. 노동운동을 했던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있었고, 함께 싸운 자들이 그 주변에 포진해 있어도 김진숙을 외면했다. “우리가 김진숙이다”라며 동조 단식을 했던 노동자들은 낙담했다. 이번 정부도 노동자의 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저들에게 구걸할 것도, 요구할 것도 없었다. 빨갱이로 몰려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는 그래도 원망할 대상이 분명했다. 하지만 권력을 움켜쥔 동지들의 변신에는 그저 하늘만 봐야 했다.

개혁이란 구호만 있고 대안이 없는 노동정책은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백기완 선생의 간절한 바람에도 노동자들은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마침내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 투쟁 309일의 기록이 깨지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 한국옵티칼하이테크(한국옵티칼) 해고노동자가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구미공장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박정혜, 소현숙 두 사람의 고공투쟁은 325일째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곁에 ‘아무도 없는’ 고공농성은 얼마나 무서운가. “뼈가 시린 게 어떤 추위를 말하는지 난 크레인에서 겪었다. 그러나 정작 뼈가 시린 건 외로움이고 고립감이었다.”(김진숙)

김진숙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해고노동자가 공중에 떠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도보행진을 시작했다. 곁에는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277일간 농성투쟁을 벌였던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이 있다. 부산 호포역에서 구미 한국옵티칼까지 열흘간 걷기로 했다. 하지만 지난날 청와대로 진격할 때 위용과 열기는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언론은 어쩌다 한번 쳐다볼 뿐이다. 모두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막장드라마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그리고 옛날의 동지들은 강을 건너가 타고 온 뗏목(노동)을 버리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들의 고공농성이 그들만의 투쟁이어도 되는가. 우리가 이토록 무관심해도 되는가. 나라가 성한 곳이 없다고 해도 이들의 외침을 이토록 무시해도 좋은가. 고공농성장에 올라가 손 한번 잡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가. 가서 무슨 일이냐고, 어쩌면 좋으냐고 물어는 봐야지. 정치한다는 그대들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억울하게 잘린 노동자들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따뜻한 밥상 앞에서 더 이상 목메지 않기를, 누구가가 두들겨 맞는 시위 장면을 보더라도 더 이상 채널을 돌리지 않기를, 빨래를 걷다 말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다보는 일이 없기를, 아이들에게 정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도리 같은 단어를 말할 때, 공연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더 이상은 없기를….”(김진숙 <소금꽃나무>)

도보행진은 내달 1일 구미 고공농성장 앞에서 끝을 맺는다. 두 선배를 맞을 생각에 설레고 있을 두 노동자가 떠오른다. 해고 노동자를 만나러 가는 선배의 무거운 발걸음과 그보다 더 무거운 마음을 헤아려본다. 백기완 선생도 안 계시고 길 위에는 찬 바람만 분다. 소현숙, 박정혜는 땅에 내려와 새해를 맞을 수 있을까. 1월8일은 그들이 공중으로 떠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김택근 시인

김택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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