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논리’라는 ‘괴담’ [플랫]
지난 국회에서 발의되었던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국회 임기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금지법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거세지고 있다. 지난달에는 개신교 단체들이 동성결혼 및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큰 혼란이 발생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배경에 젠더 이론이나 ‘정치적 올바름’(PC)에 대한 반감이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들이 우려하는 일들은 실제로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남성이 갑자기 여성으로 성별을 바꾸고서 여성용 화장실·탈의실·사우나를 이용한다든가, 남성적인 근육과 신체능력을 상당 부분 유지한 채로 여성 운동경기에 출전하는 사례들이다. 이들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용 사우나에 전형적인 남성의 외모를 가진 사람이 들어온다면 큰 당혹감과 위협감을 느낄 것이다. 여자부 경기에서 상대팀의 트랜스여성이 맹활약하여 우리 팀이 진다면 억울한 느낌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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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일들이 차별금지법 때문에 생겼을까?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차별금지법은 사우나와 경기장에서 문제가 불거지기 한참 전에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캘리포니아주를 보자. 캘리포니아주에는 정작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역에 따라 여러 법에서 차별 문제를 다룬다. 예를 들어 고용 시 차별을 금지하는 법에 ‘성적 지향’이 포함된 것은 2000년이고, ‘젠더 정체성’이 포함된 것은 2003년이다. 젠더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혐오발언 규제법에 포함된 것은 2003년이고, 공공주택법에 포함된 것은 2005년이다. 그런데 이때는 사우나에서도, 경기장에서도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다.
사우나에서 문제가 불거진 계기는 2019년 시행된 젠더 정체성 법(주 법률번호 SB-179)이다. 나라마다 성별 전환의 기준과 절차를 정해놓은 법이 있고, 그것은 당연히 차별금지법과는 별도의 법이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주는 매우 간편하게 공식 성별을 변경할 수 있도록 했다. 행정관청에 가서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면 즉시 성별이 변경되고, 바뀐 성별로 곧바로 사우나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술, 호르몬요법, 진단서, 유예기간 등이 일절 요구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다양한 사건과 분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원인은 차별금지법이 아니라 성별전환법에 있다.
이를 영국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대조점이 드러난다. 영국에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존재한다. 여러 법률에 흩어져 있던 관련 내용을 정리해서 ‘평등법’이라는 이름으로 2006년부터 시행했다. 연령, 장애, 성전환, 인종, 종교나 신념, 성별,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했고, 2010년 배우자 유무, 임신 및 모성을 추가했다. 성별의 변경은 2004년 시행된 ‘젠더 인정법’이라는 별도의 법률에서 규정한다. 그런데 변경 절차가 캘리포니아주보다 훨씬 까다롭다. 의사의 진단 및 처치 기록, 지난 2년간 다른 성별로 생활해왔다는 증인 진술이 요구되며 의사 및 법률가들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없는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지는 논란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존재하는 영국에서는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괴담은 이 역설을 설명하지 못한다. 차별금지법과 성별전환법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국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성별전환법이 아예 없어서 일일이 법원 판결을 받아야 한다. 대법원 지침에 의해 성기 수술, 의사의 진단서·감정서, 증인 진술 등이 요구된다.
영국 사례 보면 ‘괴담’ 설명 안 돼
트랜스젠더 운동선수와 관련된 논란 또한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주로 한정하면 논란의 진원은 차별금지법이 아니라 성별 구분 활동 관련 학생권리법(주 법률번호 AB-1266) 및 이와 관련된 교육 규칙, 협회 규정 등이다. 미국 전체로 넓혀 봐도 마찬가지다. 최근 몇년간 미국 대학 배구대회나 수영대회에 트랜스여성 선수가 출전하는 문제를 놓고 전국적 논란이 일었는데, 이것도 차별금지법과는 별개 문제다. 미국의 21개 주에는 성소수자 차별금지법이 아예 없다. 따라서 이 논란이 특정한 주의 차별금지법에서 기인하기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들 대회에서 트랜스여성의 출전은 차별금지법이 아니라 전미대학체육협회(NCAA)의 자체 규정에 의한 것이었다. 협회는 1년간 호르몬 요법을 받고 남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 농도가 일정 수준 이하면 트랜스여성에게 출전 자격을 주었는데, 이것이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반대 입장의 스펙트럼도 다양해서, 규정을 더 엄격하게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일절 출전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다. 비슷한 논란이 올림픽에서도 있었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볼 수 있었던 트랜스젠더 선수가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종목별 협회들이 트랜스젠더 선수의 출전 기준을 높였기 때문이다.
이번 계기에 차별금지법 추진 그룹에 몇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첫째로 자연주의를 활용해 보자. 자연 또는 본성(영어로는 둘 다 ‘nature’)으로 뭔가를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진보 사상에서 금기였다. 젠더 이론이나 사회구성주의에 따르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나도 생물학으로 사회 현상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과학철학에서 ‘환원’이라는 주제로 다루는 고전적인 이슈다. 하지만 인간이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운동경기를 남녀 따로 치르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다만 인간의 운동경기는 남녀를 이분법으로 구분하는데, 자연은 이분법적이지 않다. 파리 올림픽에서 트랜스젠더로 오인되었던 권투 금메달리스트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출생 시 여성으로 등록되고 일생 동안 스스로 여성이라고 여겨왔으므로 정의상 트랜스젠더가 아니다. 생물학 교과서에 나오는 안드로겐 무감응증(염색체가 XY다)이나 인터섹스(간성)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사실 그 밖의 어떤 경우라 해도 놀랍지 않다. 변이는 워낙 다양하고, 자연은 원래 논바이너리하기 때문이다.
‘평등관리법’으로 명칭 변경도 방법
반(反)동성애 운동가들은 과학자들이 동성애 유전자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동성애는 타고난 것이 아니며 치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생물학자들은 대체로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어떤 한 유전자가 그 사람을 동성애자로 만들어주는 그런 경우는 아니겠지만 결국은 이게 유전적인 성향일 가능성은 굉장히 높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의 성적 취향을 결정해주는 유전자들이 있다고 보는 건 우리 생물학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최재천의 아마존> 유튜브 영상) 최근 생물학자들은 많은 유전자들이 조금씩 성적 지향에 영향을 주거나(키나 IQ처럼), 태아 시절 자궁 내 호르몬 레벨이 영향을 준다고 추정한다. 이들의 기대가 근거 없는 환상일까? 동성애는 여러 문명과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상당한 비율로 나타나고 있으며, 워낙 많은 동물종에서 동성애 행동과 동성 커플이 관찰된다. 최근엔 1500종까지 늘었다. 이쯤 되면 동성애에 생물학적 근거가 있다는 생각이 무리가 아니다.
둘째로 ‘행복추구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어필해보자. 생물학자들은 동성애에 생물학적 근거가 있다고 추정하지만, 이것이 언제 어떻게 입증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이 순전히 선천적으로 결정될 리도 없다. 후천적 요인도 작용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자연)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우리의 성향이나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이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로 자유주의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얘기한, 남을 해치지 않는 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개성을 발전시킬 권리 말이다. 여기서 동성 결혼과 성별 전환이 갈린다. 동성 결혼은 남을 해치지 않는 데 비해, 성별 전환은 만일 그 문턱이 지나치게 낮아진다면 미국의 사우나나 경기장에서처럼 누군가 피해를 입었다고 느낄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지금은 차별금지법과 성별전환법의 차이를 적극 설명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어차피 다수 의견에 의한 지배이므로, 다수를 설득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셋째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명칭을 바꿔보자. ‘포괄적’이라고 칭하다 보니, 일단 반대론자들의 주장에 노출된 사람들은 이 법이 뜻밖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인상에 사로잡힌다. ‘금지’라는 부정적 표현도 걸린다. ‘평등권리법’이나 ‘동일권리법’이 어떨까 싶다.
▼ 이범 교육평론가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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