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명 넘는 교수 '시국선언'에도 잠잠한 대학가 '달라진 풍경'
대자보 대신 온라인 공간서 의견 표명…SNS서 시국선언 모집
시국선언 내용은 잘 몰라요
인문·사회 계열 재학생들이 주로 오가는 백양관 입구 등 건물 곳곳에 시국 선언 대자보가 붙어 있었지만 발걸음을 멈추거나 이를 주의 깊게 보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학생회관엔 시국 선언에 연대를 표명하는 학생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대자보가 붙긴 했지만 이마저도 한 장에 그쳤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재학생이라 밝힌 A 씨(22)는 "대자보가 붙은 걸 오늘 처음 봤다"며 "올해 초 다른 건물에서 동아리 문제를 제기하는 글을 본 걸 제외하면 이렇게 종이가 붙은 건 오랜만인 것 같다"고 했다.
연세대 음대에 재학 중인 B 씨(22)는 "대학 커뮤니티에 (교수님들의 시국선언) 소식이 올라와 알고는 있었다"며 "중앙도서관 등에 대자보가 붙어 있는 걸 봤지만 관심 있게 읽진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대학가에서 김건희 여사 특별검사 도입과 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는 교수 시국선언이 잇달아 발표되고 있지만 대학 캠퍼스 분위기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온라인에선 2030 청년들이 중심이 돼 연대 서명을 받는 모습이 이어지는 등 시민 민주주의의 축이 대학에서 온라인 공간으로 옮겨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권 퇴진 요구하는 '시국 선언'에 교수님 6000명 참여했지만…대학가는 '잠잠'
26일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24일까지 전국 67개 대학 소속 교수들이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대통령 주변과 관련된 국정 농단 의혹을 비판하고 나섰다. 참여 교수는 3000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인근에 7개 학교가 모인 신촌 대학가에서도 연세대와 이화여대 교수들이 지난 21일 시국 선언을 했다.
연세대 교수 177명은 "30년 경력의 검사 출신 대통령이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2년 반 만에 빈껍데기만 남았다"며 거부권 남용과 국정 농단 의혹을 비판했다. 이화여대 교수 140명도 "대통령의 즉각 퇴진과 함께 현 정부의 국정 전환을 강력하게 요구한다"며 "여러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수사기관 조사에 적극 협조하라"고 촉구했다.
다만 2016년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 국정농단 의혹 등으로 인한 박근혜 정권 퇴진 요구, 2019년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교체 요구로 소란스러웠던 때와 달리 대학가는 다소 잠잠한 모습이었다. 25일 오후 찾은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에서도 시국선언의 열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 손에 노트북을, 한 손엔 프린트물을 들고 걸음을 재촉하던 학생들은 시국선언의 구체적 내용은 잘 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사범대생이라고 밝힌 20대 재학생 C 씨는 "시국선언을 했다는 것만 알지 자세한 건 잘 모른다"며 "총장 선거 등 교내 이슈에 대한 글이 붙어 있는 건 종종 봤어도 시국선언 관련 대자보는 처음 듣는다"고 했다.
실제로 기자가 교내 곳곳을 둘러본 결과, 게시판엔 동아리 홍보물이나 25일부터 시작된 총장 선거 게시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근 공학 전환 논란으로 학생들이 점거 농성을 펼쳤던 동덕여대 관련 연대 대자보가 일부 보이긴 했지만 교수들의 선언문이나 이와 관련된 학생들의 연대 및 반대 대자보는 보이지 않았다.
이화여대 관계자는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를 떼는 등 조치는 따로 하지 않고 있다. 국정 농단 의혹이 있었던 2016년 같은 분위기는 아니다"라며 "교수님들께서 시국 선언과 관련해 의견문 발표만 했을 뿐, 대자보 등은 따로 붙이지 않으신 걸로 안다"고 했다.
시국 선언, 다양한 의견 표명에 불과…학내 민주주의 '교내 이슈' 초점 영향도
이런 분위기는 시국 선언과 대학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인식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예전엔 시국선언이 권위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교수가 앞장서고 시민들이 동참하는 민주화 과정이었다면 지금은 다양한 쟁점들이 서로 충돌하는 과정에 가깝다"며 "취직을 위한 중간 거점으로 대학을 생각하는 학생이 늘어 공동체 활동에 이전만큼 활발하게 참여하지 않는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총학생회 등 학내 민주주의의 구심점이 민주화, 정권 퇴진 등 거시적 주제보단 교내 성폭력 등 학내 문제 위주로 옮겨간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공학 전환 문제로 학생들이 점거 농성을 이어 온 동덕여대나 교수 성폭력 의혹이 터진 서울여대의 경우 관련 의견을 표명하는 학생들의 대자보가 줄지어 붙기도 했다.
다만 대학가의 시국선언이 시작된 지 아직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만큼, 대학생들의 참여 여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는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21일엔 대전 및 충청 지역 대학생 연합단체가 시국선언 동참을 선언했고, 25일 오전엔 고려대학교 생명공학부 소속 학생이 교수 시국선언 옆에 '윤석열 퇴진 시국선언, 함께하자'는 대자보를 붙이며 연대 서명을 받기도 했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젊은 세대가 의견을 표명하는 방식이 대자보 등 대면 방식에서 온라인 공간으로 옮겨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23일 인터넷에선 "더 이상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윤석열은 퇴진하라"라는 제목의 온라인 서명 운동이 시작됐다. 25일 오후 4시 30분 기준 166명이 참여해 서명에 힘을 보탰다.
본인을 직장인이라고 밝힌 서명 운동 관계자는 "당장 주말 집회에 나가는 건 내키지 않지만 현 정권이 더는 지속되어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평범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며 "대부분의 참여자가 20~30대의 청년이며, 실무진도 직장인, 대학원생, 취업준비생 등 일상생활을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kimyew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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