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사서 다시 마시고 싶을 만큼 인상적"…한국 와인이 궁금하셨던 분들에게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11. 25. 09:09
[스프카세] 한국 와인 시음기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 인복이 많은 편이다. 나에게 연락하고 뭔가를 제안하는 사람 대부분이 선하고 사심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왜 이렇게 운이 좋을까 생각해 봤는데, 내가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비주류 작가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먹잘 것 없는 작가에게 굳이 연락하고 만나서 기꺼이 돈 쓰고 시간 쓰는 사람이라니. 최소한 사기꾼일 리는 없지 않은가.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게 장점이 되는 순간도 있구나 싶어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날도 역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지난번에 이분들께 거하게 얻어먹었는데 매번 신세만 지고 살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이번에는 우리 부부가 식당도 예약하고 와인도 준비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상대가 워낙 미식가들이라 와인을 무엇으로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냉장고에 보관 중인 한국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건 그분들이 안 마셔 봤을 게 확실해. 흥미를 느끼지 않겠어? 모임 당일에 산머루 품종 레드 와인과 청수 품종 화이트 와인을 각각 챙겼다.
레드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산머루는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에 자생하는 포도과 식물이다. 한국의 추운 겨울과 고온다습한 여름을 잘 견디는 강인한 품종으로, 유럽 포도보다 크기가 작고 신맛과 독특한 향이 강렬하다. 산머루를 사용한 와인은 풍부한 색감과 산미를 특징으로 한다.
화이트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청수는 원래 한국에서 식용 포도로 개발되었으나, 열매가 완전히 익기 전에 쉽게 떨어지는 낙과 현상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껍질이 두껍고 씨앗이 많아 식감 면에서도 식용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양조용 품종으로는 강점이 되어, 청수는 와인 생산에 적합한 품종으로 재조명되었다. 두꺼운 껍질은 와인에 깊은 풍미와 구조감을 부여하고, 높은 산미는 깔끔하고 균형 잡힌 와인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때는 11월 17일 일요일 낮 12시. 우리 부부와 상대 부부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비건 식당 '유알티'에서 만났다. 이 집의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가 워낙 유명한지라 예약을 잡아두었다. 한국형 파스타에 한국 와인의 조합이니 제법 그럴싸하지 않은가. 일단 화이트 와인 체험부터 시작했다. 산막와이너리에서 직접 재배한 청수 포도로 양조한 '라라'를 열어서 잔에 따랐다. 구매 가격은 2만 5천 원.
정말 그러하다. 소싯적 청포도 알을 떼어내 손에 즙을 묻혀가며 먹을 때 코에서 감돌던 바로 그 냄새가 난다. 그동안 수많은 화이트 와인을 마셔봤지만, 토종 한국인에게 이렇게나 강렬한 노스텔지어를 느끼게 한 녀석은 처음이다. 파스타와의 궁합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의견도 동감이다. 이날의 파스타는 고사리 특유의 담백하면서 졸깃한 식감에다가 시골 가마솥 누룽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들기름 특유의 구수함이 특징이었고, 거기에 '마카로~니', '모짜렐~라' 같은 찰진 이탈리아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쫀득한 파스타면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다만 이런 진하고 두툼한 풍미의 음식에는 일반적으로 화이트 와인보다는 레드 와인이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청수 와인은 나중에 추가로 주문한 샐러드와 한층 나은 궁합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레드 와인 차례다. 산막와이너리에서 직접 재배한 산머루로 양조한 '비원 퓨어'를 잔에 따랐다. 가격은 3만 원. 한국 와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88점이라는 점수를 받은 이력이 있다. 제임스 서클링 88점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한입 들이켰다. 전혀 달지 않은 데다가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질감. 그러면서도 뒤에 받쳐주는 타닌이 제법 강하다. 코에서는 기존 외국 와인에서는 느끼지 못한 독특한 향이 감지된다. 구성진 판소리와도 같은 구수하고 걸걸한 느낌이랄까. 이게 바로 산머루 향이구나.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와의 궁합도 만족스럽다. 산머루 와인의 원초적이고 토속적인 향에다가 들기름과 고사리의 구수함과 담백함이 어우러지니, 참석자 네 명 모두 이구동성으로 칭찬이다. 산막와이너리한테 광고비 받은 것 없으니 솔직하게 얘기해 달라고 해도 직접 사서 다시 마시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란다. 외국 와인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드디어 그동안 신세진 걸 음식과 와인 대접으로 갚았다고 한숨 놨건만, 신당동 와인바 '기몽'으로 자리를 옮겨 벌어진 2차 술자리에서 여지없이 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 와인바의 단골인 언론인 강 씨의 추천으로 샤르도네 품종의 프랑스 스파클링 와인에다가 홍새우 비스크 파스타, 가리비 오븐구이를 곁들여 먹게 되었다. 익숙한 맛의 프랑스 와인에다가 근사한 요리가 어우러지니 앞선 1차 술자리 뺨치는 만족감을 선사한다. 두 차례에 걸쳐 알코올을 흡입하니 맨정신에 나올 수 없는 아무 말 대잔치가 펼쳐진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 인복이 많은 편이다. 나에게 연락하고 뭔가를 제안하는 사람 대부분이 선하고 사심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왜 이렇게 운이 좋을까 생각해 봤는데, 내가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비주류 작가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먹잘 것 없는 작가에게 굳이 연락하고 만나서 기꺼이 돈 쓰고 시간 쓰는 사람이라니. 최소한 사기꾼일 리는 없지 않은가.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게 장점이 되는 순간도 있구나 싶어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날도 역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지난번에 이분들께 거하게 얻어먹었는데 매번 신세만 지고 살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이번에는 우리 부부가 식당도 예약하고 와인도 준비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상대가 워낙 미식가들이라 와인을 무엇으로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냉장고에 보관 중인 한국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건 그분들이 안 마셔 봤을 게 확실해. 흥미를 느끼지 않겠어? 모임 당일에 산머루 품종 레드 와인과 청수 품종 화이트 와인을 각각 챙겼다.
레드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산머루는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에 자생하는 포도과 식물이다. 한국의 추운 겨울과 고온다습한 여름을 잘 견디는 강인한 품종으로, 유럽 포도보다 크기가 작고 신맛과 독특한 향이 강렬하다. 산머루를 사용한 와인은 풍부한 색감과 산미를 특징으로 한다.
화이트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청수는 원래 한국에서 식용 포도로 개발되었으나, 열매가 완전히 익기 전에 쉽게 떨어지는 낙과 현상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껍질이 두껍고 씨앗이 많아 식감 면에서도 식용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양조용 품종으로는 강점이 되어, 청수는 와인 생산에 적합한 품종으로 재조명되었다. 두꺼운 껍질은 와인에 깊은 풍미와 구조감을 부여하고, 높은 산미는 깔끔하고 균형 잡힌 와인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때는 11월 17일 일요일 낮 12시. 우리 부부와 상대 부부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비건 식당 '유알티'에서 만났다. 이 집의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가 워낙 유명한지라 예약을 잡아두었다. 한국형 파스타에 한국 와인의 조합이니 제법 그럴싸하지 않은가. 일단 화이트 와인 체험부터 시작했다. 산막와이너리에서 직접 재배한 청수 포도로 양조한 '라라'를 열어서 잔에 따랐다. 구매 가격은 2만 5천 원.
언론인 강 씨: 고급 와인처럼 다채로운 느낌을 주는 건 아니지만, 외국 와인을 마실 때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상큼하고 신선한 청포도 향이 제법 인상적이다. 어릴 때 먹던 청포도 사탕 향이 나서 재미있다. 입에서는 전혀 달지 않아서 반전이고. 직접 사서 더 마셔 보고 싶다.
드라마작가 박 씨: 와인이 상큼하고 아주 맛있지만, 지금 먹고 있는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와의 궁합은 의문이다.
정말 그러하다. 소싯적 청포도 알을 떼어내 손에 즙을 묻혀가며 먹을 때 코에서 감돌던 바로 그 냄새가 난다. 그동안 수많은 화이트 와인을 마셔봤지만, 토종 한국인에게 이렇게나 강렬한 노스텔지어를 느끼게 한 녀석은 처음이다. 파스타와의 궁합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의견도 동감이다. 이날의 파스타는 고사리 특유의 담백하면서 졸깃한 식감에다가 시골 가마솥 누룽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들기름 특유의 구수함이 특징이었고, 거기에 '마카로~니', '모짜렐~라' 같은 찰진 이탈리아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쫀득한 파스타면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다만 이런 진하고 두툼한 풍미의 음식에는 일반적으로 화이트 와인보다는 레드 와인이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청수 와인은 나중에 추가로 주문한 샐러드와 한층 나은 궁합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레드 와인 차례다. 산막와이너리에서 직접 재배한 산머루로 양조한 '비원 퓨어'를 잔에 따랐다. 가격은 3만 원. 한국 와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88점이라는 점수를 받은 이력이 있다. 제임스 서클링 88점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한입 들이켰다. 전혀 달지 않은 데다가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질감. 그러면서도 뒤에 받쳐주는 타닌이 제법 강하다. 코에서는 기존 외국 와인에서는 느끼지 못한 독특한 향이 감지된다. 구성진 판소리와도 같은 구수하고 걸걸한 느낌이랄까. 이게 바로 산머루 향이구나.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와의 궁합도 만족스럽다. 산머루 와인의 원초적이고 토속적인 향에다가 들기름과 고사리의 구수함과 담백함이 어우러지니, 참석자 네 명 모두 이구동성으로 칭찬이다. 산막와이너리한테 광고비 받은 것 없으니 솔직하게 얘기해 달라고 해도 직접 사서 다시 마시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란다. 외국 와인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드디어 그동안 신세진 걸 음식과 와인 대접으로 갚았다고 한숨 놨건만, 신당동 와인바 '기몽'으로 자리를 옮겨 벌어진 2차 술자리에서 여지없이 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 와인바의 단골인 언론인 강 씨의 추천으로 샤르도네 품종의 프랑스 스파클링 와인에다가 홍새우 비스크 파스타, 가리비 오븐구이를 곁들여 먹게 되었다. 익숙한 맛의 프랑스 와인에다가 근사한 요리가 어우러지니 앞선 1차 술자리 뺨치는 만족감을 선사한다. 두 차례에 걸쳐 알코올을 흡입하니 맨정신에 나올 수 없는 아무 말 대잔치가 펼쳐진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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