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과학주의’ 트럼프와 ‘괴짜’ 머스크…기술통제 고삐 풀리나
’권력과 과학의 관계를 말하다’
지난 14일(현지 시각)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후보 단일화에 힘을 보탠 로버트 프랜시스 케네디 주니어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했다. 내정자는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로 정치 명문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성장해왔다. 소식이 전해지자 금세 논란에 휩싸였다. 트럼프는 “미국인은 너무 오랫동안 공중 보건과 관련해 속임수, 잘못된 정보, 허위 정보에 관여한 식품 산업계와 제약회사들에 짓밟혀왔다”며 케네디가 복지부 수장이 돼 높은 수준의 과학 기준을 갖춘 연구 전통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대체의학을 신봉하는 백신 불신론자로서 ‘비과학’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다음날 제약업체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국민 건강 책임자에 대체의학 신봉자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제프 멀건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대 교수를 만났다. 그는 사회혁신 분야의 세계적인 지성으로 손꼽힌다. ‘사회혁신을 위한 정치의 역할’을 주제로 한 국회 특강에 앞서 이뤄진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일주일 전 미국에서 다시 대통령에 뽑힌 트럼프에 대한 이야기로 물꼬를 텄다. 기존 정치적 문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가 긴장하고 있다. 사회혁신 분야 또한 단기적으로 정치에 기대를 걸기 어렵게 됐다. 되레 시계가 거꾸로 가지 않을까 걱정이 크다. 인류 앞에 커다란 도전으로 떠오른 기후위기와 인공지능(AI) 문제 등을 트럼프가 어떻게 풀어나갈지 전 세계가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다. 멀건 교수도 낙관적 기대를 하지 않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보건과 환경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반과학적’인 행태를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전 세계가 힘을 합쳐 공기의 질, 합성 생물학, 양자 컴퓨팅 등을 관리하기 위한 새 기관을 만드는 일도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본다. 그런데 기후 변화에 맞서 당장 어떤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미국 또한 더 많은 홍수와 허리케인, 산불을 겪게 될 것이다. 이처럼 2020년대 반과학적 이데올로기와 우리가 처한 현실 간 간극과 모순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트럼피즘(트럼프주의) 2.0’이 위기에 맞서는 인류의 공동 대처를 더 어렵게 할 것이란 전망이다. 멀건 교수는 케네디를 예로 들었다. “트럼프는 케네디를 지명하면서 자신의 반과학적 견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케네디는 광적 음모론자다. 기후 변화에도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다. 그가 백신 반대론을 폈던 사모아에서 많은 아이가 죽었다. 그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사모아에서 일어난 일에 케네디가 실제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 따져봐야 하겠지만 그와 같은 음모론에 기반을 둔 반과학적 접근이 사람들에게 더 큰 희생과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2019년 오스트레일리아 동편 섬나라 사모아에서 홍역이 발생해 수십 명이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앞서 백신 접종으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가짜 뉴스가 번져 백신 불신을 초래했다. 그러자 예방 접종률이 크게 떨어지면서 홍역 유병률과 치명률이 갑자기 높아졌다고 한다.
과학, 정치란 프리즘으로 분리된 두 세계
사실 케네디에 뒤지지 않을 만큼 트럼프 자신 또한 ‘반과학 정치인’의 대명사다. 코로나 팬데믹이 덮쳤을 때 그는 몸에 자외선을 쬐거나 소독약을 몸속에 주입하면 어떻겠냐고 황당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또 자신이 복용하고 있다며 말라리아 치료제인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권장했지만, 미 국립보건원은 효과가 없다고 밝혔다. 지난봄 멀건 교수는 우리말로 옮긴 책 ‘과학이 권력을 만났을 때’에서 “트럼프와 푸틴 같은 정치인이나 이들의 조언자이자 이념가들은 자신들만의 사실과 의미로 가득 찬 세계를 창조하고는 과학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과학을 향해 거침없이 경멸적 언사를 날린다. 신화의 세계가 과학의 세계를 단도직입적으로 강타하는 사례”라고 썼다.
‘신화의 세계’에 빠진 정치는 몇몇 개인의 신념을 넘어서서 더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미국에서 실시한 한 여론조사를 보면, 봉쇄와 사회적 거리 두기, 백신 접종 의향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정치 성향과 과학을 바라보는 태도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였다. 조사 결과 트럼프 지지자와 백신 회의론 사이 관계는 거의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또 퓨리서치 조사에서는 보수 성향의 공화당원은 17%만이 과학자들을 믿는 데 반해 진보 성향의 민주당원은 67%가 과학계를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은 정치란 프리즘을 통과해 나오면서 두 개의 분리된 세계로 나뉜다.
멀건 교수는 인터뷰와 책에서 ‘정치의 반과학적 태도’의 위험성을 경계하며, ‘정치의 과학화’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정치가 과학을 불신하거나 맹신할 게 아니라 제대로 알고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기술의 ‘자율주행로’ 깔리기 시작한 미국
반대로 멀건 교수는 비과학적 태도만큼이나 간섭받지 않는 과학과 과학 지상주의를 경계했다.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과학이 도움을 줄 순 있겠지만 순수하게 과학에 기반을 둔 정책을 펼 수 있다는 믿음도 문제다. 예를 들어 많은 정부가 인공지능 분야의 정책 방향을 정할 때 이 분야 과학자의 조언을 받으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실수’다. 과학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케네디를 복지부 장관으로 내정한 사실이 트럼프의 ‘비과학적’ 면모를 드러낸다면, 테슬라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에게 ‘정부효율부’를 맡긴 건 과학에 대한 간섭과 규제를 확 걷어내겠다는 신호다. 트럼프는 머스크를 대통령 자문위원회 성격의 정부 효율부 수장으로 내정하면서 “관료주의를 해체하고 과도한 규제를 줄이며 낭비성 지출을 줄이고 연방 기관을 구조조정 할 길을 닦아줄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규제 완화’는 머스크의 이해관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가 추구하는 ‘과학 비즈니스’는 더 맘껏 자율주행 모드로 내달릴 수 있게 된다.
지난 선거 때 1800억 원이 넘는 돈을 트럼프와 공화당에 뿌린 머스크는 트럼프의 최대 후원자이자 중요한 정치적 동반자로 떠올랐다. 그는 지난 몇주 동안 트럼프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중 하나로 등장했다. 둘의 ‘로맨스’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정치적 환경은 자율주행 자동차, 뇌에 칩을 이식하는 뉴럴링크, 스페이스엑스와 화성 정착촌 건설, 로봇 ‘옵티머스’, ‘로보택시’ 등 첨단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한 머스크의 비즈니스가 정치적 통제와 간섭을 덜 받으면서 보다 자유롭게 실험하며 이윤을 추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테슬라는 트럼프 당선의 최대 테마주로 떠올랐다. 주가는 대선 이후 40% 가까이 급등했다.
정치, 과학과 기술에 대한 통제 수단
트럼프의 과학에 대한 불신과 무지의 틈새를 잘 파고든 머스크가 ‘기술의 자율주행’에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우호적인 환경이 마련된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과학을 다룰 정치의 관리 역량과 의지는 더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과학과 기술에 대한 통제와 규제, 감독은 느슨하게 이뤄질 공산이 크다.
멀건 교수가 트럼프와 머스크의 관계, 더 나아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과학과 정치의 관계를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그는 정치를 통한 과학에 대한 합리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인공지능을 예로 들었다. 그는 인공지능 과학자들은 ‘규제하지 말라’거나 ‘자유롭게 내버려 두라’고 하겠지만 이는 자동차를 만들어 놓고서 속도와 안전, 음주, 배기가스 등에 대한 기준을 세우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미친 짓’이라고 했다.
멀건은 책에서도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정치 말고는 (과학에 대한) 통치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과학을 우리의 가장 강력한 동맹으로 만들려면 그 과학을 이끄는 수많은 권한과 결정은 결국 정치에서 나와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정치가 지금보다 과학을 더 잘 이해하고, 정치 또한 집단의 지성을 더 잘 끌어낼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봤다.
정치의 과학화와 맞물려 ‘과학의 정치화’도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대중의 삶에서 정말 필요한 게 뭔가? 과학과 기술의 두뇌가 국민에게 중요한 일에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과제에 기술이 봉사하도록 기술발달을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멀건 교수는 지구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쥔 트럼프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과학 자본가’ 머스크의 ‘동맹’은 공동체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둘 다 이제껏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살아왔다. 머스크가 정부와 함께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부는 영리하게 대처할 수 있겠지만 일부는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그들도 결국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세상이 더 연약하고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거짓말할 권리 아닌 진실에 대한 권리
‘거짓’은 과학과 정치의 관계를 더욱 뒤틀리게 하거나 이상하게 교배시킨다는 점에서, 멀건 교수는 ‘진실’을 무척 강조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머스크를 위험스럽게 봤다. “지난 10년 동안 소셜 미디어가 전 세계에 잘못된 정보와 거짓을 퍼뜨렸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큰 피해를 봤다. 머스크는 언론의 자유를 매우 신봉하는 사람인데, 언론의 자유가 ‘거짓말할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진실에 대한 새로운 법적 관리가 필요하다. 정부가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거짓말을 하면 처벌받아야 한다. 머스크는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그가 엑스(X, 옛 트위터)를 거짓말의 원천으로 삼고 정부 기관을 이용해 거짓말을 퍼뜨릴지 모른다. 우려되는 지점이다. 이는 전 세계를 매우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멀건 교수는 진실에 대한 새로운 법적 권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유럽인권조약과 같은 문서에 ‘진실에 대한 포괄적인 새로운 권리를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사회혁신 예산 삭감 이해 못 해
인터뷰 말미에 그에게 사회 혁신과 사회적 경제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무관심을 넘어선 적개심과 대대적인 예산 삭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의 답이다. “일부 보수적인 정부는 사회혁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수적 정부가 사회혁신의 가장 훌륭한 챔피언인 경우도 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사회혁신에 큰 관심을 보였다. 유럽연합에서는 보수 정치인인 조제 마누엘 바호주와 장클로드 융커 전 집행위원장이 사회 혁신의 옹호자였다. 우파 정부가 들어선 핀란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사회혁신을 위한 지출을 크게 늘렸다. 지역 사회가 어려움을 겪고, 가족의 결속이 약화하고, 노숙자가 늘고, 고령자들이 돌봄을 받지 못하는데도 하드웨어와 새로운 기술에 많은 예산을 지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한국의 보수 정부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다른 나라 보수 정치인들과 이야기를 나눴으면 싶다. 한국은 연구개발(R&D) 예산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4%대나 되는데, 사회 혁신에는 대체 몇 퍼센트나 지출하고 있는지 관료들에게 묻고 싶다. 4%대가 될 필요는 없지만 1%대 미만이라면 그 이유가 도대체 뭔지 궁금하다. 이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사회혁신이란?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키려는 동기로 유발되고, 1차 목표가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런 조직들이 주도적으로 개발하고 확산시키는 혁신적인 행동과 서비스를 말한다. 공동체 자산 구축으로 지역경제를 살린 영국 프레스턴시 모델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제프 멀건 교수는 누구?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대에서 집단 지성과 공공 정책, 사회 혁신을 가르친다.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싱크탱크 ‘데모스’를 창립했다. 혁신을 지원하는 재단 ‘네스타’와 구조적 불평등을 개선하는 ‘영파운데이션’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 4차 산업혁명의 혁신과 기업가정신을 연구하는 ‘세계경제포럼’(WEF) 그룹의 공동 의장을 맡고 있다.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 총리실 산하 미래전략위원회의 전략 기획관을 지냈다. ‘메뚜기와 꿀벌’, ‘사회혁신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하며, 어떻게 추진하는가’, ‘좋은 권력과 나쁜 권력’ 등의 책을 펴냈다.
류이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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