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지폐 기술로 한땀한땀 새겨 인왕제색도 판화로 만들었죠. 내년엔 맹호도 출시”

윤희훈 기자 2024. 11. 2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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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폐공사 가성현 디자인 총괄 인터뷰
마이크로 단위 조각으로 산수화 농담(濃淡) 표현
소형 작품엔 화폐 이미지로 재미 요소 가미
국보 216호로 등록된 정선 '인왕제색도'. 고(故) 이건희 회장의 개인 소장품이었으나, 2021년 국가에 기증됐다./조선DB

조선 영조 27년인 1751년, 겸재 정선은 평생을 사귄 벗이었던 시인 이병연이 병으로 위중하자 그의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이병연의 집 마당은 인왕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비 내린 후의 인왕산을 한 폭에 담은 산수화, ‘인왕제색도’의 유래로 알려진 이야기다.

인왕제색도는 1984년 국보 제216호로 지정됐다. 삼성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에 전시돼 있다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사망한 후 2021년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으로 국가에 기증됐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진경산수화의 정수로 손 꼽히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일반인도 소장할 수 있는 또다른 기회가 생겼다. 한국조폐공사가 제작한 ‘예술형 요판화’다. 요판화는 음각판화기법을 활용한 판화를 말한다. 지폐 전면의 인물과 후면의 그림을 새길 때 이 기법이 사용된다. 음각 판화로 찍기 때문에 이미지는 볼록하게 구현된다.

가성현 한국조폐공사 책임 연구위원이 13일 대전 유성구 조폐공사 본사 회의실에서 인왕제색도 요판화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조폐공사 제공

예술형 요판화 사업을 기획·총괄한 가성현 한국조폐공사 기술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을 지난 13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조폐공사 본사에서 만났다.

가성현 책임은 요판화 제작 과정을 ‘한땀한땀 수를 놓는 과정’이라고 소개했다. 판화를 새길 합금판을 평탄화하는 작업부터 많은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평평해보이는 합금판을 거친 사포(샌드페이퍼)부터 해서 부드러운 사포로 ‘방’(사포의 거친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수를 높여가며 평탄화를 합니다. 그러다보면 기포처럼 볼록 나온 부분이 생겨요. 그러면 또 다듬고, 그러다보면 아주 평평해지죠. 이후에는 고운 면포로 계속 닦아요. 그러면 광이 반짝반짝 납니다.”

이렇게 판화를 새길 합금판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판화에 새길 그림을 해체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요판화는 점과 선만으로 이미지를 구현한다. 어떻게 점을 찍고, 선을 그어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이미지를 구현한다.

요판을 제작하기 위해선 기존 이미지를 해체해 점과 선으로 재구현해야 한다. 오만원권 지폐에 들어간 신사임당 초상화의 원본 이미지와 요판선화 비교 그림. /한국조폐공사 제공

가 책임은 “이미지를 해체하고, 밑그림을 그리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며 “밑그림이 나오면, 이걸 요판화에 새기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 작업도 3개월 이상 소요된다”고 말했다. 그는 “깨끗하고 평탄하게 만든 합금판에 10㎛(마이크로미터, 0.01㎜) 단위로 음각 조각을 하게 된다”며 “이런 디테일이 위조를 방지하는 기술”이라고 했다.

마이크로 단위의 세밀한 조각 기술은 어떻게 연마를 했을까. 가 책임을 비롯해, 이번 예술형 요판화에 서명을 남긴 신인철 디자이너는 모두 미대 출신 직원이다. 가 책임은 “1996년 조폐공사에 입사해 계속 요판 제작을 했다”며 “입사 초기에는 요판을 파는 작업은 하지 못하고, 합금판을 닦으며 선배들로부터 기술을 전수 받았다”고 말했다.

조폐공사가 예술형 요판화를 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홍보·기념품 용도로 예술형 요판화 비매품을 제작한 바 있다. 이중섭의 ‘황소’,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줍기’,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 등 유명 작품을 제작했고, 명화수집가들 사이에서 호응을 받았다. 조폐공사로선 예술형 요판화 판매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일종의 시장조사가 된 셈이다.

한국조폐공사 온라인쇼핑몰에서 인왕제색도 요판화가 모두 품절됐다. /홈페이지 캡처

이번에 판매한 인왕제색도 요판화는 대형(824*546㎜) 300점, 중형(526*356㎜) 500점, 소형(310*196㎜) 2000점만 한정 제작됐다. 대형은 49만5000원, 중형은 24만5000원, 소형은 4만9500원에 판매됐다. 대형 작품은 모두 완판이 됐고, 중형과 소형은 오프라인 판매점에만 소량 남아있는 상태라고 한다.

대형과 중형은 세밀한 이미지 구현으로 예술성에 중점을 뒀다면, 대중성을 겨냥해 제작한 소형 작품에는 숨은 그림을 새겨 넣으며 재미 요소를 추가했다. 가 책임은 “시중에 많은 아트프린팅(상업인쇄) 작품과 차별화를 하기 위해 요판화에 화폐와 관련한 이미지를 일러스트처럼 넣었다”며 “프랜차이즈 영화의 쿠키 영상처럼 다음 작품을 예고하는 작은 그림도 넣었다”고 말했다.

가 책임의 설명을 듣고 소형 요판화 샘플 이미지를 세밀하게 들여다 봤다. 10원부터 500원까지 동전 모양과 천원권, 오천원권, 만원권, 오만원권 이미지를 찾을 수 있었다. 원작에는 없는 호랑이 그림도 보였다.

한국조폐공사가 제작한 인왕제색도 예술형 요판화 소형 버전에 들어간 숨은그림찾기. /한국조폐공사 제공

가 책임은 “인왕산 호랑이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음 작품의 예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다음 작품이 호랑이와 관련된 것이냐?’고 묻자, 가 책임은 “그렇다. 내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맹호도’를 예술형 요판화로 제작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현재 이미지를 해체해 밑그림을 구상하는 중인데, 맹호도 속 호랑이의 털을 어떻게 구현해야 가장 효과적일지 고민이 많다”고 했다.

가 책임의 설명을 듣다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기술자와 예술가, 본인은 둘 중 어디에 속한다고 보세요?’라고 우문을 던졌다. “위조 방지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섬세한 기술도 필요하고, 훌륭한 미술 작품을 재창조할 수 있는 예술적 능력도 필요하죠. 기술 예술가 혹은 예술 기술자 아닐까요”라는 현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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