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보다] 보험왕의 ‘두 얼굴’
[더 보다 35회 II] '보험왕'의 두 얼굴
이승훈(가명)씨는 지난해 어머니의 집을 6년 동안 살던 아파트에서 바로 길 건너편 원룸으로 옮겼습니다. 어머니가 아흔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이승훈(가명)/보험사기 피해자
"정말 그래도 좀 (어머니가) 노년에 뭐 크지는 않지만 편안하게 좀 쉬실 곳을 만들어 놓으셨고 그렇게 옮겼는데 이제 장00 때문에 그렇게 돼가지고 .."
모든 건 '보험왕'이라고 불렸던 그 사람, 장 모 씨를 만난 뒤 벌어졌습니다.
2년 전 처음 만난 DB손해보험의 보험 설계사 장 씨는 자신을 1000명이 넘는 고객을 관리하는 '보험왕'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녀의 화려한 경력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훈(가명)/보험사기 피해자
"보험왕이라는 사실은 명함이나 아니면 뭐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와요. 그리고 워낙 가장 강조한 게 자기가 DB손해보험에서 27년 근속했다.자기가 쭉 27년간 근속하면서 맺고 있던 전현직 임원들과의 친분관계가 꽤 있다는걸 말했었죠"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던 몇 달 뒤, 장 씨는 이 씨에게 좋은 보험 계약 건이 있다며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큰 공장의 화재 보험 등 큰 보험을 갱신하면 고액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승훈(가명)/보험사기 피해자
"(장 씨가)DB손해보험의 법인 계약자나 아니면 큰 계약자들이 있다, 그 계약자들이 1년 또는 2년에 만기가 도래하는데 그 만기되는 시점 이전에 그 계약건 연장을 성사시켜야 한다고 했어요. 그 계약금 또는 보험금을 자기가 먼저 선납함으로 해서 그 계약을 선점하면 거기에 따른 수당이 있는데, 조기에 또 계약을 성사시켰기 때문에 추가적인 수수료가 더 나온다는 말이었죠"
자신이 받은 수수료 중 일부를 원금과 함께 돌려준다고 했던 장 씨. 재작년 9월, 처음 이 씨가 보낸 3천만 원은 하루 뒤에 30만 원의 수수료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20일 뒤 장 씨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엔 다른 보험을 갱신하는데 필요하다면서 5천만 원을 보내주면 50만원의 수수료와 함께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보험사 계좌가 아니라 장 씨 개인 계좌로 돈을 보내달라는 점이 의심스러웠지만, 장 씨는 그때마다 더 큰 수수료를 얻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약속했던 날짜에 돈이 들어오자 한 번에 보내는 금액도 더 커지게 됐습니다. 그렇게 거래를 이어가던 지난해 3월. 장 씨가 약속했던 원금과 수수료를 돌려주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이 씨는 불안한 마음에 장 씨를 추궁했지만 갖은 핑계로 말을 돌릴 뿐이었습니다.
장 씨 소속 회사를 찾아가 사업단장에게 연락을 한 이 씨.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런 보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험회사 관계자는 " 회사와도 무관한 일이라며 더 이상 연락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 씨. 장 씨에게 돌려받지 못한 돈은 10억 원이나 됐고, 그 속엔 어머니의 아파트를 판 돈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승훈(가명)/보험사기 피해자
"어머니랑 한 10분, 20분을 앉아있기가 힘들어요. 왜냐하면 뭐 계속 울컥하고 어머님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 니까 막.."
보험왕 장 씨의 오랜 고객이었던 김민선(가명)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장 씨를 통해 가족들의 암보험 등 17건의 보험상품을 계약하며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장 씨는 김 씨에게도 보험 갱신을 위한 선납에 돈을 넣으면 꾸준히 좋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김민선(가명)/보험사기 피해자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얼굴도 알고 가족도 알고 DB라는 회사도 있고 그렇잖아요. 사무실에 우수대리점 상 받은 거 있고 판매왕 뭐 이거 현관부터 사진이 걸려 있고 그러니까 진짜 열심히 잘하는 사람인가 보다. 저는 이제 그렇게 믿고 간 거죠."
4년 전, 처음 천만 원을 건넨 김 씨에게도 약속된 날짜에 원금에 더해 30만 원의 수수료가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장 씨를 믿기 시작한 김 씨의 투자 금액은 점점 커져 한 번에 5천만 원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 씨에게 돌아왔던 돈도 지난해 4월부터 더는 오지 않았습니다. 김 씨는 장 씨를 추궁하며 계약서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장 씨는 영업비밀이어서 보여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김 씨는 결국 지난해 7월 장 씨를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그제서야 자신보다 앞서 장 씨를 고소한 피해자들이 더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피해자들은 지난해 8월 보험회사에 내용증명을 보내 장 씨의 사기를 알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회사는 "장 씨를 위한 개인 상품은 없다"며 "회사와는 무관"하다고 했습니다.
현재까지 보험 갱신에 따른 수수료를 주겠다며 장 씨가 속인 피해자는 경찰이 확인한 것만 적어도 17명. 대부분 오랫동안 보험 계약을 해 왔던 고객들로 이들이 돌려받지 못한 돈은 1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장 씨는 피해자들에게 받은 돈을 자신의 실적을 유지하기 위한 보험 대납에 쓰거나 한 사람의 돈을 받아 다른 사람의 돈을 갚는 이른바 ‘돌려막기’에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큰 피해를 낸 '판매왕' 장 씨의 보험사기. 그렇다면 회사는 장 씨의 사기 행각을 알지 못했을까?
또 다른 피해자 권혁상(가명)씨는 처음 보험회사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아 피해를 더 키웠다며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권 씨 역시 장 씨가 소개한 보험 갱신 투자에 넘어갔습니다.
처음 돈을 넣은 건 지난해 6월, 2천만 원을 달라고 한 장 씨는 보름 뒤 150만 원의 수수료를 더해 돌려줬습니다. 장 씨는 더 많은 수수료를 줄테니 큰 금액을 투자하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권 씨가 20억 원이 넘는 큰 돈을 넣기 시작한건 지난해 12월부터 입니다.
권 씨는 돈을 넣기 한 달전인 지난해 11월, 장 씨가 일하던 사무실을 방문해 보험회사 관계자들을 만난 뒤 장 씨를 더 굳게 믿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권혁준(가명)/보험사기 피해자
"사무실을 방문을 했었을 때도 거기에 있는 설계사들 이렇게 보면 장00씨를 아주 영웅처럼 이렇게 했었죠. 인사를. 왜냐하면 보험왕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잖
아요. 또 보험 회사 건물에도 자기 방이 따로 있었었고. 수상 내역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충분히 보여줬기 때문에 의심을 안 했었었죠."
하지만 당시는 이미 다른 피해자들이 장 씨로부터 사기를 당했다고 회사 측에 알린 뒤였습니다.
장 씨가 일했던 사무실을 찾아가 사정을 물었더니 회사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장 씨 개인의 문제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DB손해보험 관계자
"이 사람(장 씨)이 갖고 얘기했던 게 회사에 상품이 있거나 계약서가 있거나 이러면 당연히 회사가 책임지는 거예요. 뭐 얼마 투자하면 이자율 몇 % 주겠다는 이런 내용들, 회사에는 그런 상품 자체가 없어요."
처음 문제가 불거진 지난해 여름부터 DB는 회사와 관계없는 개인의 사기 사건이라는 주장으로 일관했습니다.
피해자들이 회사 계좌로 돈을 보낸 이력은 확인하지 못했고, 보험 대납도 없었다는 겁니다.
다만, 고객 불만의 책임을 물어 지난해 11월 장 씨의 수상 이력을 취소하고 영업정지 한 달을 부과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장 씨의 고객들에게 보험을 사칭한 상품에 유의하라는 메시지도 보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장 씨에 대한 영업 정지 처분이 이뤄진 건 2주 뿐이었고, 정지가 끝나자마자 장 씨는 영업활동을 재개했습니다.
그 무렵, 장 씨는 실적을 인정 받아 공로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권혁준(가명)/보험사기 피해자
"(다른 피해자들이) 고소도 했고 DB보험에다가 민원도 넣고 내용 증명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멈춰주지 않은 게 저는 너무 억울한 거죠. 만약에 멈춰줬다던가 아니면 사무실이라도 좀 빼냈으면 저희가 이렇게 믿지는 않고 신뢰를 하지 않았었죠"
피해자들은 현재 회사 측을 상대로 법적 다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현재 법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보험회사가 보험설계사를 통해 얻는 이득에 비해 문제가 생겼을 경우 책임을 지는 수준은 매우 낮다고 지적했습니다.
박기억/변호사
"보험상품 같은 경우에는 이제 보험 소비자 보호 쪽으로 나가야 됩니다. 이를 위해 보험회사의 책임을 강화하고 보험설계사도 책임 있는 보험 모집 활동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이제 그것을 인정하기에는 지금 너무나 멀죠.
보험설계사가 보험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일하는 것 만큼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는데 그런 책임을 지는 제도를 안 만든거죠."
조태욱/변호사
"회사에서는 형식적으로 1년에 1번, 1년에 2번 교육을 받게 해요. 너 사기 치지 마. 이런 교육을 받게 하면서 우리 이렇게 관리를 했어, 우리는 이런 식으로 모집인들을 꾸준히 관리하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 회사의 책임은 없어. 저사람이 사기를 쳤지만 나의 책임은 없어라는 그런 어떤 면죄부를 하나 들고가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그것도 피해자 입장에서는 하나의 넘어야 될 산이고. 가장 큰 산은 당연히 돈을 모집인 개인계좌로 넣은 이유가 설득력이 있었냐 하는 부분이에요.
장 씨의 재판은 현재 진행중입니다.
아직 고소장을 제출하지 않은 피해자들도 있어,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권혁준(가명)/보험사기 피해자
장00씨를 만나도 저희가 가서 보면 이제는 배째라 식입니다. 나는 5년만 살고 나오면 돼. 몇 년만 살고 나오면 돼. 지금 수많은 사람들 피해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5년만 몸으로 때운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
최근 4년간 보험사기에 연루돼 업무정지나 등록 취소 등 제재를 받은 보험 설계사 수는 300명이 넘습니다. 이들 중엔 장 씨처럼 ‘보험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김헌수/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
"우리나라 보험산업의 이제 약점 중에 하나가 굉장히 영업 중심적이다. 보험왕들은 사실은 영업 잘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주는 칭호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분들한테 관심과 그리고 과도한 또 뭐 영향력 이런 것들이 생기고 소비자들이 보면 그래서 그분들이 마치 보험회사의 직원 또는 모든 책임을 다 들어줄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경향이 생기는거에요"
지난해 보험회사의 수입료는 237조 원, 대부분의 계약은 보험 설계사를 통해 맺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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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수 기자 (kbs03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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