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분노 산 'VIP 행사'에 깔린 한화갤러리아의 그림자
한화갤러리아에 무슨 일이…
명품관 처음 도입한 갤러리아
VIP만 위한 행사 ‘P-데이’ 논란
거리로 나온 입점업체 노동자들
정기휴무 대신 P-데이 진행
“쉴 권리 보장 못 받는다” 주장
주력 백화점 사업 실적 악화
식음료 신사업 성과는 아직
무리하게 백화점 운영했나…
공개매수에도 주가 부진한 흐름
# 명품관의 대명사는 '갤러리아(한화갤러리아)' 백화점이다. 1990년 서울 압구정동에 문을 열어젖힌 갤러리아 명품관은 국내 백화점 업계에 명품관이란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그랬던 갤러리아가 최근 논란의 도마에 올라섰다. 지난 18일 갤러리아 입점업체 일부 직원들이 "갤러리아가 무리하게 VIP 행사를 진행하는 등 직원들의 쉴 권리를 뺏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다. 이른바 VIP 초청행사인 'P(Prestige)-데이' 논란이다.
# 누군가는 "경기침체로 기업의 실적이 신통치 않은데, 직원들이 '쉴 권리'를 운운하면서 회사를 압박하고 있다"고 반론을 편다. 편견이다. P-데이 논란의 이면엔 침체의 늪에 빠진 갤러리아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 경영 전략 실패에서 비롯된 실적 침체의 책임을 애먼 노동자에게 전가했다는 게 P-데이 논란의 핵심이란 거다. 갤러리아에선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정기휴무는 거짓말, 'P-데이' 중단하라." 지난 11월 18일 서울 압구정 갤러리아백화점(한화갤러리아·이하 갤러리아) 명품관 앞에서 일부 입점업체 직원들이 시위를 벌였다. 백화점면세점판매서비스노조 소속인 직원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갤러리아의 정기휴무일이던 이날 사측이 VIP 초청행사인 'P(Prestige)-데이'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P-데이는 갤러리아의 VIP 고객만 초청하는 쇼핑행사다.
노조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갤러리아는 다른 백화점 대비 휴무일이 적은 데다 그마저도 P-데이를 진행해 직원들이 제대로 쉴 수 없다. 올해엔 갤러리아 명품관·광교점 등에 '무휴월無休月'까지 만들어 휴식권을 빼앗고 있다."
갤러리아는 올해 5월과 11월 두차례에 걸쳐 P-데이를 진행했다. 경쟁사인 신세계백화점(신세계)은 VIP 초청행사를 폐지했고, 롯데백화점(롯데쇼핑)은 올해 한차례만 진행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노조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여기에 3월·8월·10월·12월을 무휴월로 지정해 갤러리아의 연간 휴무일은 8일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측은 "갤러리아 소속 직원들은 대체휴무를 통해 휴식권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면서 "입점업체 직원들의 경우 휴무를 강제할 수는 없지만, 법적 휴일을 준수하도록 권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입점업체 직원들의 휴식권 보장은 각 입점업체의 소관이라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짚어볼 건 있다. 입점업체는 갤러리아의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는 데다, 이런 논란에 휩싸인 건 갤러리아의 녹록지 않은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어서다. 그동안 VIP 고객을 대상으로 '명품' 위주의 전략을 펼쳐온 갤러리아가 '쉬지 않고 매장을 열어야 할 만큼' 한계에 부딪힌 건 아니냔 거다. 갤러리아는 왜 이런 논란에 휩싸인 걸까. 하나씩 살펴보자.
■ 적자의 늪 = 갤러리아는 1990년 국내 백화점 시장에 '명품관'이란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샤넬·에르메스·루이비통 등 주요 명품 브랜드가 입점한 '갤러리아 명품관(서울 압구정)'의 경우 2021년 매출액 1조원을 돌파하는 등 백화점 매출 순위 10위권(이하 순위는 업계 추정치)에 이름을 올려왔다. [※참고: 한화갤러리아는 서울 압구정(명품관), 수원(광교점), 천안(센터시티점), 진주(진주점), 대전(타임월드점) 등 백화점 5곳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 상황은 사뭇 다르다. 갤러리아 명품관은 2023년 백화점 매출 순위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올해 상반기 12위에 머물고 있다. 대전 지역 터줏대감으로 불렸던 갤러리아 타임월드점의 입지도 약화했다.
2021년 대전에 신세계 아트앤사이언스점(대전신세계)이 들어서면서다. 갤러리아 타임월드점은 대표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의 매장을 사수하는 덴 성공했지만, 1년 만에 '충청권 백화점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물론 경기침체 장기화로 백화점 업황이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롯데백화점 잠실점, 더현대서울(현대백화점) 등 경쟁사 주요 점포가 최대 매출액을 갈아치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갤러리아에 위기의 시그널이 울린 건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갤러리아의 올해 3분기 매출액은 1147억원으로 전년 동기(1200억원) 대비 4.4%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2분기 연속 적자(1분기 –44억원·2분기 –19억원)를 기록했다.
■ 보수적 행보 = 이 때문인지 한편에선 갤러리아가 '변화의 물결'에 올라타지 못한 결과란 지적을 내놓는다. 백화점 업계가 점포를 증축해 규모를 키우고, 젊은층이 선호하는 브랜드를 입점시키는 등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갤러리아의 행보는 지나치게 보수적이었다는 거다.
일례로 현대백화점은 2021년 여의도에 서울 시내 최대 규모(영업면적 8만9100㎡)의 백화점 더현대서울을 열어젖혔다. 더현대서울은 다양한 팝업스토어와 신규 브랜드를 파격적으로 유치하면서 MZ세대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드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물론 갤러리아도 변화를 추구하고 있긴 하다. 내년 12월까지 갤러리아 명품관을 대대적으로 리뉴얼하는 건 대표적 사례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매장을 확장 이전하는 등 명품관을 리뉴얼하고 프리미엄 콘텐츠를 강화한다는 게 골자다.
장기적으로는 갤러리아 명품관을 지하철역(압구정로데오역)과 연결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지난 5월 서울시가 추진하는 '도시건축디자인혁신 사업'에 갤러리아 명품관 재건축 사업인 '어 주얼 포 서울(A Jewel for Seoul)'이 선정됐기 때문이다.
영국 유명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이 설계를 맡아 갤러리아 명품관을 모래시계 모양으로 재건축하고, 지하철과 연계한 지하광장을 마련한다. 예정대로 사업을 진행할 경우 현재 지하 1층~지상 4·5층 규모인 갤러리아 명품관은 지하 7층~지상 8층으로 커진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계획이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데다, 유명 디자이너가 참여한다고 해서 반드시 실적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뼈아픈 전례前例도 있다. 갤러리아가 2020년 야심차게 문을 연 광교점이다. 갤러리아 광교점은 네덜란드 출신 유명 건축가 렘 콜하스가 설계를 맡아 이목을 끌었지만, 아직까지 샤넬·루이비통 등 주요 명품 브랜드를 입점시키지 못하고 있다.
■ 성과 못 낸 신사업 = 갤러리아의 실적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이유는 또 있다. 갤러리아가 추진한 신사업들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갤러리아는 지난해 외식사업을 담당할 에프지코리아를 설립하고 미국 햄버거 브랜드 '파이브가이즈'를 론칭했다. 강남점을 시작으로 서울 시내 5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와인 수입·유통을 주력으로 하는 '비노갤러리아', 커피전문점 빈스앤베리즈를 운영하는 '한화비앤비', 올해 9월 인수한 음료 제조업체 '퓨어플러스'를 축으로 식음료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매출액 중 식음료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9.4%(2024년 3분기 기준)에 그친다. 퓨어플러스를 제외한 3곳은 당기순이익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논란을 불러일으킨 P-데이 행사의 밑단엔 갤러리아의 현주소가 깔려 있다. P-데이를 두고 '이런저런 혁신을 꾀할 생각은 하지 않고 VIP의 지갑을 여는 데만 골몰했다' '경영진의 실패를 애먼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갤러리아의 주가도 부진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지난 8월엔 오너 3세인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이 "책임 경영을 강화하겠다"면서 지분 공개매수에 나섰지만 주가는 반짝 상승하는 데 그쳤다. 9월 9일 1567원까지 올랐던 한화갤러리아 주가는 현재 1100원대애 머물고 있다.
[※참고: 김동선 부사장은 지난 8월 23일부터 9월 11일까지 20일간 한화갤러리아 지분 3400만주 공개매수에 나섰다. 공개매수 가격은 8월 22일의 종가(1303원) 대비 22.8% 높은 1600원으로 책정했다.] 갤러리아를 보는 시장의 평가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거다.
안승호 숭실대(경영학) 교수는 "갤러리아는 명품 위주로 탄탄한 고객층을 확보해왔지만 반면 젊은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은 비교적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면서 "다양한 콘텐츠를 강화하기 위한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갤러리아는 과연 논란을 딛고 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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