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파는 엄마들로 가득한 골목...비참했던 거리에서 ‘거물’이 나왔다 [히코노미]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11. 2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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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노미-9] 1년만에 돌아온 고향 땅. 귀향한 청년의 눈에 들어온 건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 도시의 모습이었습니다. 전쟁의 상흔도 상흔이지만, 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 건 무너져버린 삶의 기반이었습니다. 일자리가 없어 전전하는 가장, 배급에 길게 줄을 선 시민, 새끼를 먹이기 위해 몸이라도 팔아야 했던 엄마들.

물건으로 가득했던 화려한 상점은 텅텅 비었습니다. 생필품 하나라도 구하려고 온 사람들은 가방 한가득 돈을 꾸깃꾸깃 담아 옵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배상금을 위해 정부가 돈을 찍어내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전쟁은 참 참혹해.” 월터 베이즈의 언더월드. 1918년. 공습을 피해 지하로 대피한 시민들을 묘사한 그림. 기사 내용과는 관계없음.
한평생 성실히 저축하며 살아 온 사람들은 망연자실입니다. 자식들의 미래라고, 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한 통장의 숫자들은 이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돈으로도 빵 한덩어리 사기가 어려운 현실. 도시는 고장 난 나침반처럼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청년은 상념에 접어듭니다. 세계를 움직인 정치인들의 허망한 욕망이 없었다면, 자신의 도시가 얼마나 평화로웠을지를, 또 얼마나 번영했을지를요.

정치보다 시장(Market)이 우선하는 사회를 청년은 그리기 시작합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였습니다. 거물 경제학자 케인스의 영원한 맞수이자, 자유주의 사상의 대부입니다.

“인간이 시장보다 우월할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오.” [사진출처=libertarianism]
케인스가 시장 만능주의 비판의 선구자였다면, 하이에크는 정부 만능주의의 날카로운 저격수였습니다. 오늘날 3조 2000억달러에 달하는 암호화폐 시장도 그의 이론이 기반이 됐습니다. 경제보다 정치가 우위에 있는 하수상한 세월. 그가 꿈꾼 세상을 함께 돌아볼 시간입니다.
제국의 수도에서, 허름한 도시로
1899년 오스트리아 빈. 이곳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본부’였기 때문입니다. 빈에서 결정되는 의사결정은 제국 곳곳으로 퍼져나가, 수많은 사람의 삶을 결정지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시민으로 산다는 건 제국의 1등 신민이라는 뜻이었지요.

의사 아우구스트는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황제의 결정을 지지하고, 제국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던 애국 시민. 그는 아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게도 자신과 같은 국가관을 심어줬습니다. 1917년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와중 프리드리히가 군에 입대한 계기였습니다. 그의 나이 고작 18살이던 때였습니다.

“춤추자, 제국의 신민들이여.” 화가 빌헬름 가우스가 그린 빈 시청에서 열린 무도회. 1904년.
입대 1년이 갓 지났을 무렵인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이 맺어집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배의 쓴맛을 봤습니다. 제국이 해체되고 영토가 8분의 1로 줄었습니다. ‘생제르맹’ 조약이었습니다. 몸통을 잃고 머리만 남은 시신처럼 오스트리아는 황량함 그 자체였습니다.

잃어버린 건 제국의 자존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의 삶마저 하나하나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승전국이 물린 가혹한 배상금이 원인이었습니다. 조폐국이 밤낮으로 찍어내는 지폐 탓에 물가가 폭등합니다. 지폐는 그저 종이에 불과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시민들이 일궈놓았던 삶의 토대가 무너졌다는 의미였습니다.

존 싱어 서전트의 ‘가스전’. 전장에 끌려 온 군인을 묘사한 그림.
젊은 군인 하이에크가 고향 땅에 돌아와서 본 건 구걸하는 시민들과 어린이였습니다. 당장의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 몸을 파는 엄마들.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엔 결코 볼 수 없던 풍경이었습니다. 유럽 문화의 정수였던 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전기가 사라진 도시는 어둠 그 자체였고, 빵이 귀해진 도시는 퀭한 얼굴의 시민으로 가득합니다. 과거 광활한 제국의 영토에서 수도 빈으로 향하던 물산의 공급망이 중단된 영향이었습니다.

혼돈의 빈. 하이에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때 집어 든 책이 케인스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였습니다. 케인스는 책에 썼습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그곳에서는 기아와 추위, 질병, 전쟁, 살인과 혼돈의 무질서가 일어나고 있다.”

청년 하이에크는 그때부터 경제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을 겁니다. 경제학의 거물 ‘케인스’가 평생의 숙적이 될 줄은.

“죽었어?” 화가 에릭 케닝턴의 ‘라벤티의 켄싱턴’. 1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을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1915년 작품.
자유주의 대가 미제스를 만나다
“전쟁은 인간의 오류가 만든 끔찍한 결과물이지.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부정확하고 변덕스러워.”

전쟁에 대한 기억은 그의 학문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인 만든 오만과 욕망이 시민들을 전쟁의 수렁에 밀어 넣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전쟁 채무를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됐을 때 그는 인생의 스승을 만납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였습니다.

“시장보다 우월한 정부는 없네, 젊은이.” 하이에크의 스승 루드비히 폰 미제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그의 지론은 명확합니다. “국가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다.” 하이에크는 미제스에게 완전히 빠져듭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그가 꾸준히 품어 온 의문을 미제스가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몇 년 후 그는 미제스의 수제자가 되어 있었지요. 미제스와 함께 오스트리아 경기순환연구소(1927년)를 설립할 정도였습니다.

“경제를 계획한다고? 그건 다 헛소리에 불과하지.” 미제스의 저작 ‘사회주의 체제의 경제적 계산’(1920년작)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 경제학계에서 두각을 드러냅니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인위적인 개입이 경제 상황을 악화시킨다는 걸 논리와 실증으로 입증하면서입니다. 그의 명성은 오스트리아를 벗어나 영국까지 닿았습니다.
하이에크, 경제수도 런던에 닿다
“런던으로 와주십시오.”

1931년 하이에크는 한 대학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영국 런던정경제대학(LSE)으로부터 였습니다. 시장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깊은 이론에 매료된 경제학자 라이오넬 로빈스가 하이에크를 교수로 초빙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경제학의 수도이자, 그를 경제학으로 이끈 남자 ‘케인스’의 나라. 어쩌면 운명이 그를 이끈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런던 LSE에서 하이에크는 케인스의 케임브리지와 결이 다른 경제학 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사진출처=Umezo KAMATA]
그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세계 경제학자들은 격론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1929년부터 불거진 세계 경제 ‘대공황’을 두고서였습니다. ‘황금의 20년대’가 가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초강대국 미국에서 주식시장 가치 90%가 날아간 대폭락. 거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는 급증하는 암울한 현실이었습니다. 케인스가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주문한 건 이때부터였습니다. 대규모 공공사업으로 시민을 직접 고용해 그들에게 돈을 쥐여주라는 제언이었지요.

“오늘 먹을 게 없는데...”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미국의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진.
거물 경제학자 케인스의 이론이 주목받기 시작할 때, 반기를 든 젊은 학자. 하이에크였습니다. 1931년 발표한 ‘가격과 생산’은 케인스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하이에크는 세계적 대공황의 원인부터 다르게 진단합니다. 각국 은행이 금리를 내리면서 자원이 왜곡됐기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돈을 빌리는 비용이 낮아진 탓에 돈이 흥청망청 쓰였다는 비판. 침체는 결국 중앙은행의 인위적 개입이 불러온 부작용을 치료하는 과정이라는 게 하이에크의 생각이었습니다.

“케인스식으로는 경제는 더욱 엉망이 되겠지” 하이에크.
그는 주장합니다. “강제적인 신용 팽창(정부의 인위적 부양 정책)으로 불황을 해결하려는 건 악을 유발한 바로 그 수단으로 악을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정부 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스와 정반대의 해결책이었습니다. 케인스는 하이에크의 저작을 읽고 간단한 평을 남깁니다. “내가 읽은 것 중 가장 끔찍한 혼란 중 하나. 허튼소리를 왕창 뒤섞어 놓은 글.”
케인스에 밀린 하이에크
“케인스가 세계를 구했다.”

세계의 모든 경제정책은 케인스의 바람대로 흘러갑니다. 위기에 빠진 경제를 구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대규모 부양책 ’뉴딜‘을 도입하면서입니다.

도로, 댐과 같은 대규모 건설을 정부가 주도하고 시민에게 일자리를 주는 방법이었습니다. 돈이 생긴 시민들이 다시 구매를 시작하고, 기업들은 물건 생산을 위해 공장을 가동합니다. 1936년 미국의 전체 생산은 대공황 이전인 1929년 수준을 회복합니다. ‘케인스 혁명’이었습니다.

“땅을 깊게 파세요. 그리고 다시 메우세요.” 정부는 비숙련 노동자를 대규모로 고용해 높은 실업률에 맞섰다. 케인스식 처방전이었다.
하이에크는 케인스에게 완전히 밀렸습니다. 위기를 그대로 두라는 하이에크의 해결 방식을 주목할 리 없었습니다. 세계의 모든 시선이 케인스로 향합니다.

하이에크는 침묵했지만, 사상의 연필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습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그는 국가권력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갖기 시작합니다. 정치가 주도하는 ‘계획경제’가 불러온 폭력을 다시 한번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빈은 이런 도시가 아니었는데...”오스트리아 빈을 청소하고 있는 유대인들. 1차세계대전 이후 빈은 관용과 포용의 정신을 모두 잃어버렸다.
히틀러가 런던을 폭격하면서 하이에크는 케인스가 강의하는 케임브리지로 피난하기도 했습니다. 세계적 경제학자인 두 사람이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 예배당에서 함께 보초를 서는 생소한 풍경도 연출됐지요(실제로 두 사람은 이론적으로 대립했지만 사적으로는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하이에크는 이렇게 적습니다. “우리가 만날 때 보통 경제학 얘기는 하지 않았다. 사적으로 우리는 매우 좋은 친구였다”).
하이에크의 약진
“경제를 계획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문제에 간섭할 때까지 그 통제력을 확장할 것입니다.”

1944년 3월, 영국의 출판계가 들썩입니다. 하이에크의 신규 저작 ‘노예의 길’이 출판되면서입니다. 자유시장을 옹호하고, 계획경제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짓밟는지를 보여주는 글. 하이에크가 1·2차 세계대전 참상 속에서 일궈낸 통찰입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자본주의보다 우월합니다.” 국가 사회주의 경제적 우월성을 찬양하는 1929년 소련의 선전 포스터.
경제적 자유를 권력에 양도할 경우, 결국 정치적 자유도 양도하게 된다는 경고였습니다. 하이에크에게 경제 법칙에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건 ‘치명적 자만’이자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길이었습니다. 극우 히틀러와, 극좌 스탈린이 증명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던 저 위정자들이 만든 끔찍한 결과물을. 정치가 만든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루한 삶을. 경제 위에 국가를 두는 모든 체제를 향한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경제학은 모든 국가권력으로부터 ‘탈주’를 목표하는 ‘자유’라는 이름의 비행선이었습니다. 흔히 하이에크를 부자만을 위한 경제학자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자유시장의 중요성을 외친 지성이었습니다.

“경제적 자유를 양도한다는 것, 그건 너의 자유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지.” 노예의길 초판.
세계가 하이에크의 책을 꺼내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만들겠습니다.”

케인스주의가 세계 경제체제를 지배한 지 40년이 흘렀을 무렵입니다. 1973년 전 세계 경제가 흔들립니다. 중동 정세 불안, 베트남전으로 인한 대규모 적자, 철강 산업의 치열한 경쟁이 맞물리면서입니다.

미국이 지독한 독감에 걸리자, 세계는 폐렴을 앓았습니다. 물가는 상승하는데, 실업률은 폭등합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이었습니다. 물가가 상승하면 실업률은 하락한다는 기존 경제학 이론과 배치되는 현실. 케인스 이론이 다시 수세에 몰립니다.

“돈도 없는 나에게 가스마저 빼앗아 간다면, 머리에 총알을 박아주지.” 1974년 미국의 한 가정집.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는 케인스의 이론을 폐기합니다. 오랫동안 구석에 밀려나 있던 하이에크의 이론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입니다.

두 사람의 정책은 간단합니다. 경제위기는 정부의 과도한 경제 개입에 따른 부작용이라는 것. 옥죄어 있던 시장에 더 큰 자유를 주자는 것. 하이에크가 오랜 세월 주장하던 것이었습니다. 후대 학자들이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정책이었습니다.

“우리는 하이에크의 선생의 말대로 더 작은 정부를 지향합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1981년 7월 TV연설에서 세금 감면 정책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감세, 규제 완화, 정부지출 축소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핵심이었습니다. 특히 대처는 하이에크의 책을 들고 이렇게 외쳤지요. “하이에크는 파멸과 재앙의 예언자가 아니라 평화와 풍요의 예언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 노동조합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두 철의 지도자들은 결코 포기를 몰랐습니다.

(‘부의 양극화’라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두 사람이 밀어붙인 정책으로 세계 경제는 시나브로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공공기관의 비효율성도 개선되었고, 물가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듭니다. 하이에크는 1974년 노벨경학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거물 경제학자로 자리합니다.

“이제 공짜 우유도 끝이래... ” 마거릿 대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이유로 학교 우유 배급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그녀가 철의 여인으로 불린 이유였다.
“우유는 엄마가 사주는 거야 얘들아.” 마거릿 대처 총리.
국가라는 권력의 위대한 감시견 하이에크
하이에크의 사상은 케인스주의와 함께 경제사의 거대한 기둥을 이룹니다. “정부가 해결하라”는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비대해질때마다 그의 철학은 언제나 우리에게 경고장을 내밉니다.

약 10년 전 국가와 정치가 개입하지 않은 화폐를 만들겠다는 어떤 이들의 꿈은 암호화폐 시장으로 꽃피었습니다. 어느덧 3조달러가 넘는 거대 시장으로 자리 잡습니다. 하이에크가 국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민간 화폐를 꿈꾼 덕분입니다. 파괴된 고향 땅에 선 젊은 청년 군인의 상념이 만든 위대한 결과물입니다.

권력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인간의 자유 본능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입니다. 그 탈출선에는 하이에크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비대한 국가권력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이에크의 이름을 떠올릴 것입니다. 모두 것이 ‘정치’로 귀결되는 대한민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민간이 만든 화폐는 안정성과 신뢰도에서 정부의 것보다 더 우월할 수 있네.” 1981년 82세의 하이에크(오른쪽).
“정부를 의심하게. 시장을 믿으시게. ” [사진출처=Flickr-Levan Ramishvili]
<네줄요약>

ㅇ1차 세계대전 군인으로 참전한 하이에크는 극심한 물가상승과 물자 부족으로 고통받는 도시를 목격했다. 전쟁의 고통은 그가 정치와 인간의 행동을 신뢰하지 않는 배경이 됐다.

ㅇ오스트리아 학자 미제스로부터 사사한 그는 ’자유시장‘ 원칙이 경제의 근본 해결책이라고 봤다.

ㅇ1970년대 세계 경제위기 때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하이에크의 처방전을 활용했다.

ㅇ하이에크는 방만한 정부의 고삐를 부여잡는 사상이었다. 정치에 중독된 우리 사회가 가장 기억해야 할 이름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ㅇ니컬러스 웝숏, 케인스 하이에크-세계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꾼 세기의 대격돌, 부키, 2014년

ㅇ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노예의길, 나남, 2006년

‘경제’는 맛보기에 어려운 식재료입니다. 채권, 이자, 화폐라는 단어만 들어도 쓴맛이 올라옵니다. 맛있게 즐기려면 ‘역사’라는 양념이 필요합니다. 역사(히스토리)와 경제(이코노미)를 결합한 연재물 ‘히코노미’는 먹음직한 요리를 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격주로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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