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억 횡령, 8억 사기 쳐도 ‘집유’…경제범 형량, 이대로 괜찮을까
3건 중 1건이 집행유예…경제범죄 급증하지만 현실은 ‘감형’의 연속
(시사저널=정윤성 기자)
#1. 2014년 12월 부산 해운대구 아파트에서 부부 모임을 운영하던 A씨의 계좌에 275만원이 꽂혔다. "동생이 운영하는 미용실에 방문하는 술집 종업원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속은 피해자 C씨가 돈을 입금한 것이다. 생활비와 가게 운영비 정도를 마련할 생각으로 시작한 거짓말이었지만 A씨의 범행은 점점 대담해졌다.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실제 이자를 지급하며 대출금을 돌려 막고, 계좌 명의를 옮겨가며 피해자 C씨로부터 3년간 181회에 걸쳐 8억7200만원을 편취했다.
결국 A씨는 재판정에 서야 했지만, 그는 감옥에 가지 않았다.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덕분이다. 3억1300만원을 변제한 점, 동종 전과가 없는 점, 사건 범행을 모두 인정하고 있는 점 등이 감경 요소에 반영됐다.
#2. 한 기업에서 재무팀장으로 일하던 B씨는 2017년 1월부터 2020년 11월까지 194회 걸쳐 회삿돈을 횡령했다. 회사 계좌와 우리사주 조합 계좌를 관리하던 업무 권한을 악용해 빼돌린 금액만 14억원에 달했다. 횡령액 대부분을 해외 선물투자에 탕진해 피해액의 절반가량을 변제하지 못했다. B씨는 1심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등이 고려되면서 2심에서 6개월 감형됐다.
이처럼 규모가 수억원에서 수십억원대에 달하는 경제범죄는 그 수법과 유형이 천차만별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장기간 이뤄지고, 피해자에게 돌이키기 어려운 재산상 피해를 안긴다는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처벌 수위는 상대적으로 낮은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 강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남의 돈 마음대로 써도 남는 장사
시사저널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법원에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경법) 위반으로 징역형이 선고된 판결문 311건을 분석한 결과, 피고인들이 받은 평균 형량은 3.08년에 불과했다. 이는 최소 징역 3년으로 규정된 특경법의 하한선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피고인이 다수인 경우, 가장 중한 형을 받은 건만 집계했다.
특경법은 일정 금액 이상 규모로 발생한 사기, 횡령, 배임 등 특정 경제범죄에 대해 형법보다 무거운 처벌을 부과하는 법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기, 횡령, 배임의 경우 범죄 금액이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이면 3년 이상 유기 징역,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으로 가중 처벌된다. 사기를 예로 들면, 현행 형법은 일반 사기 범죄에 대해 10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을 규정하고 있다. 특경법 적용을 받을 경우 이보다 엄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조사 결과, 특경법 위반이 적용된 혐의는 대부분 사기였다. 적용된 혐의 329건 가운데 225건으로, 전체의 68.3%를 차지했다. 횡령이 73건으로 뒤를 이었고 배임이 18건, 수재·공갈·사금융 알선 등 기타 혐의는 13건이었다. 이에 따른 총 범행 규모는 6389억7000만원에 달했다. 사기 규모가 3849억7000만원으로 절반 이상이었고, 횡령·배임 규모도 2419억2000만원으로 사기 사건을 빼면 대부분을 차지했다.

금액 사용처가 기재된 피고인 241명 가운데 163명(67%)은 범죄로 얻은 돈을 개인 소비 목적으로 사용했다. 개인 소비엔 주로 생활비, 채무 변제, 사치품 구매 등이 포함됐다. 도박과 유흥에 범죄수익을 사용한 피고인은 33명(13.6%), 주식·코인·부동산 투자 등에 사용한 피고인은 25명(10%)이었다. 다만 판결문에 '개인 소비 목적'으로 적힌 경우 투자 목적으로 범죄수익을 사용한 경우도 상당수 포함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투자 목적은 이보다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범행이 오랜 기간 계속되거나, 여러 번에 걸쳐 이뤄진 경우도 많았다. 범행 기간이나 횟수가 명시된 판결문 중 피고인이 1년 이상 범행을 지속한 사례는 71건이었다. 범행이 30회 이상 여러 번 일어난 경우도 70회로 집계됐다.
피고인이 돈을 다 써버린 탓에 피해 회복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판결문에서 피해액의 변제가 충분치 않다고 언급된 피고인은 112명이다. 반면 피해 회복 노력이 충분해 유리한 양형 요소로 참작돼 감경된 피고인은 96명이었다.
이처럼 피해 규모가 수억원대인 데다 피해를 회복하지 못하는 피해자도 많지만, 처벌은 상대적으로 관대했다. 징역형을 받은 피고인 311명 중 109명이 집행유예도 함께 선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경법의 법정 최소형이 징역형임에도 피고인 3명 중 1명꼴로 실제 감옥행은 면하고 있는 셈이다.
감옥에 가도 기간은 짧은 편이었다. 대법원 양형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도 형량이 최소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범죄 금액별로 나눠보면 사기, 횡령, 배임액이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일 때 평균 형량은 2.9년으로 집계됐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피해액을 유형별로 구분해 양형기준을 두고 있는데, 사기범의 경우 이 구간에서 3~6년의 징역이 기본형이다. 횡령·배임은 징역 2~5년을 기본형으로 두고 있다. 이를 고려하면 평균 형량인 2.9년은 기본형의 하한에 가까운 수준이다.
범죄 규모가 50억원을 넘어도 결과는 비슷했다. 이 금액대에서 피고인들이 받은 평균 형량은 5.2년인 것으로 나타났다. 양형기준을 보면 피해액 50억원 이상 300억원 미만의 사기에 대해선 5~8년의 징역이 기본형이다. 횡령·배임은 이 구간에서 4~7년의 징역을 기본으로 한다. 범죄 규모가 커져도 기본형의 하한에 가깝게 선고되는 점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경제범죄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피해자 울려도…변제하면 감옥 안 가
물론 법원도 피고인의 형량을 결정하는 데 여러 요인을 합리적으로 고려한다. 형량의 범위를 결정하는 데 대표적으로 고려되는 것이 '특별양형인자'다. 특별양형인자란 양형을 위해 특별히 지정하고 있는 요소들을 뜻한다. 일반적인 형량의 감경·가중 요소 외에 사건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정을 반영하기 위해 설정된 기준이다. 예를 들면 사기 범죄에는 피해자가 처벌을 불원하거나 실질적 피해를 회복받은 경우 등을 감경 요소, 피해자에게 심각한 피해를 야기한 경우나 상습범인 경우 등을 가중 요소로 적용해 형량의 범위를 결정할 수 있다.
수억원을 편취했지만 집행유예에 그치는 사례가 많은 것도 이런 요소가 적용됐기 때문이다. 실제 2019년 한 주식회사의 경리로 근무하던 D씨는 대표이사로부터 명의신탁 받아 보관하던 주식 94억원 중 6억원어치를 매각해 생활비와 부동산 투자 등에 사용하고, 배당금 1억2000만원까지 마음대로 썼다. 이후 D씨가 피해자의 주식 반환 요청도 거부하면서 주식 전체를 불법 영득할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까지 법원에서 인정됐다. 하지만 D씨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민사소송을 통해 피해액의 3분의 2가량이 회복됐고, 결과적으론 주식을 모두 반환한 사실이 특별양형인자로 고려되어서다.
범죄 규모의 차이가 커도 형량이 비슷한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올해 서울고등법원에서 피고인 E씨는 피해자 26명으로부터 33억원을 편취한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올해 광주지방법원에서 6억원을 편취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F씨 역시 4년의 옥살이를 하게 됐다. 두 사건의 피해금액이 5배 넘게 차이 나는데도 형량은 똑같은 셈이다. E씨는 4억원을 변제한 점이 정상 참작된 반면, F씨는 유흥과 도박으로 범죄수익을 모두 탕진해 피해 회복이 어렵다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법무법인 시우 부산 사무소의 이용민 변호사는 "법정형의 하한에 가깝게 판결됐거나 집행유예로 판단된 데엔 합의나 공탁 같은 감경 요소, 기존 판례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며 "절대적인 금액뿐만 아니라 개별 사건의 구체성을 따져봐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양형기준을 기계적으로 따르다 보니 가벼운 처벌이 이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특경법은 형법에 비해 가중 처벌하는 법정형이 정해져 있지만, 실무적으로 양형기준 내에서 처리하기도 하다 보니 추세적으로 놓고 보면 처벌이 가볍게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최근 들어 크고 작은 경제범죄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2023년 사기, 횡령, 배임이 포함된 지능범죄 발생 건수는 최근 5년 내 최고치를 기록했다. 발생 건수는 2020~21년만 해도 42만4642건에서 36만1107건까지 줄며 감소세를 보였다. 하지만 2022년 40만5105건으로 뛰더니, 2023년 43만2525건으로 3만 건 가까이 불어났다.

경제범죄자 3년 새 껑충…대법원도 처벌 강화
범죄자 검거 건수 역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21년 21만5471건이던 지능범죄 검거 건수는 지난해 24만3310건까지 늘어났다. 검거 인원 역시 같은 기간 21만381명에서 24만1954명으로 3만 명 넘게 뛰었다.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경제범죄의 중대성도 부각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검찰청 검찰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범죄로 구공판 처분을 받은 피의자 수는 9604명으로 집계됐다. 2022년(7091명)에 비해 2513명 늘어난 규모다. 구공판이란 피의사실 또는 범죄사실이 중대한 경우 검사가 법원에 정식 재판을 청구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법원의 조사와 심리가 필요할 만큼 중대한 경제범죄 사건이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다. 늘어나는 경제범죄 추세를 고려하면, 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양형위도 최근 경제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강화하기로 했다. 양형위는 지난 8월 제133차 전체회의를 통해 사기 범죄 양형기준 수정안을 마련했다. 5억~50억원 미만과 50억~300억원 미만 유형의 기본 형량 상한을 높이고 조직적 사기에 대해선 무기징역도 선고할 수 있도록 권고 형량에 포함시켰다. 양형위가 기준을 손보는 건 13년 만이다.
아울러 감경 요소인 '실질적 피해 회복(공탁 포함)' 및 '상당한 피해 회복(공탁 포함)'에서 '(공탁 포함)'이라는 문구도 모두 삭제하기로 했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기습 공탁으로 형이 감경되는 것에 대한 지적이 잇따른 데 따른 조치다. 양형위는 공청회와 의견 수렴 절차 등을 거친 뒤 내년 3월 수정된 양형기준을 최종 의결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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