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100년 장수기업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시사저널=이진우 MBC 《손에 잡히는 경제》 앵커)
세계은행이 최근 내놓은 '중진국 함정'(The middle income trap)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는 우리의 상식과 충돌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00년 기업이 많을수록 좋다고들 생각하지만, 100년 기업이 많다는 건 오히려 그 나라 경제에 문제가 많다는 걸 의미한다는 게 세계은행의 분석이다.
'선진국으로 떠오르기 위해 애쓰는 말레이시아와 멕시코, 인도, 페루, 베트남 등 수많은 중진국은 왜 수십 년째 계속 중진국에 머물러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쓰인 이 보고서는 100년 기업이 국가 경제에 해롭다고 결론 내린다.
미국에서는 창업한 지 30년 된 기업이 창업한 지 5년이 채 안 된 기업들보다 평균 4.5배의 임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창업한 지 40년이 넘은 기업들은 설립 5년 미만 기업들보다 임직원 수가 무려 7배나 많다. 기업이 성장하면서 고용이 늘어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이상하게도 미국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창업한 지 40년이 넘었어도 창업 5년 미만 기업들이 고용한 임직원 수의 2~3배를 고용하는 데 그친다. 미국의 기업들만 오래될수록 규모가 계속 커진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는 기업이 오래되어도 규모가 커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 이유가 뭘까.
문제의 핵심은 기업의 규모가 잘 커지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어느 나라든 시간이 흐르면서 한계에 부닥치는 기업도 있을 수 있고 경쟁력을 잃는 기업이 있을 수도 있다. 그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런 기업들이 도태되거나 다른 기업에 흡수되는데, 미국 이외 나라에서는 그런 약한 기업들도 계속 명맥을 유지하면서 100년 기업으로 살아남고 있더라는 것이다.
100년 기업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100년을 살아남은 기업이라면 계속 혁신하고 발전하고 경쟁 기업들을 흡수하면서 그 규모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커져 있어야 한다. 규모는 고만고만하면서 100년을 이어온다는 건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지 않다는 뜻이고, 혁신이 없더라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다른 뭔가가 있다는 방증이다. 그건 대개 카르텔 덕분이거나 규제 장벽 때문에 새로운 기업이 치고 들어오기 어려운 구조에서 기인한다.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100년 기업은 매우 드물거나 아예 없는 게 맞다. 100년 전에 설립된 기업이 지금도 계속 그 분야 1등이라면 그건 그 기업이 훌륭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100년 동안 그 분야에 새로운 기업의 도전이 없었거나 변변찮았다는 뜻이다. 아니면 기존 기업의 영역을 지켜주는 각종 규제와 카르텔이 많다는 의미다. 그런 나라의 경제가 오죽하겠는가.
미국의 경우 설립된 지 20년 넘은 기업을 모두 모아놓고 이 가운데 소규모 기업이 얼마나 되는지 그 비율을 조사하면 40%가 채 안 된다. 많은 스타트업이 탄생하지만 얼마 안 가 망하거나 다른 기업으로 흡수되면서 '나이가 많은 소규모 기업'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설립된 지 20년 넘은 기업 중 소규모 기업의 비율이 95%를 넘는다. 인도의 기업들은 잘 망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커지지도 않는다는 의미다. 아마 이렇게 계속 이어가는 100년 기업이 인도에는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미국 S&P500지수 편입 기업들의 평균연령은 1920년대에 67년이었으나 지금은 15년에 불과하다. 글로벌 기업으로 분류되는 우량한 기업들의 평균수명도 1935년 90년에서 1970년에는 30년, 2015년에는 15년으로 줄어들었다. 기업 생태계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좋은 신호다.
우리나라에는 320만 개 중소기업이 있는데 평균수명은 12.3년이며 30년 이상 장수기업은 6.6%에 불과하다. 50년을 넘긴 장수 중소기업은 0.2%다. 이 숫자를 보고 안타까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장수 중소기업이 늘어나는 게 위험 신호라는 게 세계은행 보고서의 결론이다.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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