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뒤엔 사라지는 다른 별에서의 하룻밤 [융프라우 알레취빙하]

빙하기를 걷는다. 6만 년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에 만들어졌다는 알레취빙하Aletsch Glacier. 2시간 뒤에 먹을 샌드위치 간이 맞을지, 너무 짠 건 아닌지를 고민하는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산과 산 사이 패인 곳을 '계곡'이라 하지만, 여기선 감히 그럴 수 없다. 한강보다 넓은 거대한 '흰 세월'이 산과 산 사이에 있다. 빙하가 산을 압도한다. 계곡이 힘으로 산을 눌러버리는 말도 안 되는 풍경.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알프스에서 가장 큰 빙하'다운 걸 넘어, 지구가 아니었다.
거대한 바위산 아이거 속 터널을 통과해 나온 융프라우철도가 우주선 인듀어런스호처럼 느껴졌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블랙홀을 빠져나온 우주선 말이다. 알레취빙하가 펼쳐진 3,000m대 세상은 밀러 행성 같았고, 하네스와 크램폰을 차고, 로프를 연결해 안자일렌을 하는 우리는 우주복을 입고 탐험을 나서는 대원들 같았다.

스위스 아웃도어 가이드협회 공인 가이드인 프레디 그로스니클라우스Freddy Grossniklaus의 인솔 하에 9명이 로프 하나로 연결되었다. 한국등산학교 한필석 교장, 동신항운 송진 대표, 주민욱 사진기자와 스위스인 4명이 1박2일 동안 빙하 하이킹 팀이 되었다.
빙하 길이만 23km, 두께는 최대 900m에 이른다. 밀러 행성 구경은 잠시 미룬다. 안자일렌 적응이 우선이다. 9명이 한 줄로 연결되었기에 한 명이 돌발행동을 하면 모두 멈춰야 한다. 왼손으로 앞사람과 연결된 로프가 땅에 끌리거나 밟지 않도록 잡고, 오른손으로 스틱을 짚는다.

첫날, 융프라우요흐역(3,454m)에서 콩코르디아산장(2,850m)까지 고도를 내리는 일정이다. 8월 말의 알레취빙하는 설원에 가깝다. 거대한 스키 슬로프마냥 온통 눈과 얼음이다. 긴 발톱의 크램폰을 등산화에 결속했기에 미끄러지지는 않는다. 비교적 완만한 내리막이라 더 속도를 낼 수도 있지만 앞사람과 적당히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오늘 처음 만난 스위스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도 관건이다.
국제 산악가이드협회UIAGM 공인 가이드인 프레디는 지난해 부스알프 하이킹을 함께했던 구면이다. 융프라우 일대의 난이도 높은 첨봉도 가이드 가능한 고산등반가이자 프로 스키어이지만, "난이도를 떠나 모든 가이드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는 "빙하에선 크레바스가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며 "절대 로프를 풀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지구력만 있다면 등산 초보자도 가능한 대중적인 하이킹이지만, 가이드 지시를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것.

예보상으로는 맑음이었으나, 구름의 생각은 달랐다. 3,000~ 4,000m를 오가며 온통 안개 속으로 만들었다가, 알프스 험산을 보여 주길 반복한다. 덕분에 단조로운 경치인데도 지루할 틈이 없다. 수평선 끝까지 이어질 것마냥 아득해 보이던 빙하는 금방 새로운 경치를 데려다 놓는다. 온통 흰색 같지만, 막상 다가가서 걸으면 회색, 분홍색, 주황색으로 다른 빛을 띤다.
정지 화면 같은 빙하는 매일 34cm를 움직인다고 한다. 매일 얼고 녹고, 쌓이고, 밀려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모래와 돌이 섞인다. 프레디는 "이 중에는 사하라사막에서 바람에 실려 온 흙도 있다"고 한다. 고도를 내릴수록 옷을 한 겹씩 벗는다. 결국 긴 팔 옷 하나만 입고 걷는다. 고도를 내리자 구름이 물러가고, 파란 하늘이 지구인을 반긴다.

고도를 낮추자 둘러싼 능선이 검은 바위벽을 드러낸다. 다채롭고 입체적인 풍경이 2부의 시작을 알린다. 여전히 밀러 행성처럼 외딴 별 느낌은 지울 수 없다. 6만 년 전 만년설을 밟는 촉감도 국내 겨울산행과는 완전히 다르다. 고도를 내리자 크레바스의 출연이 잦아진다.
줄을 묶은 일행들의 점프에 긴장이 묻어난다. 성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지날 수 있는 작은 장애물이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입은 사람을 움츠려들게 만드는 공포가 깃들어 있다.

알레취의 1시간이 한국의 1년 같다
어제 다녀온 융프라우(4,158m) 등반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다. 콧대 높은 여왕을 오르느라 자존심 버리고 호흡이 극한으로 밀리며 헉헉 거렸는데, 고도를 내리는 완만한 얼음길에서는 의연한 동작으로 인상 쓰지 않고 여유롭게 알프스를 즐길 수 있다.
모처럼 점심시간. 가이드의 허락 하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자연 화장실을 찾는다. 다른 하이킹 팀과도 몇 백 미터씩 거리를 두고 있어, 적당한 장소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6만 년 전 얼음과 내 몸에서 나온 노폐물의 만남이라니.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행여 빙하에 피해를 주는 건 아닌가 싶었으나 가이드는 "괜찮다"고 한다.
스위스 아웃도어 협회 가이드 인솔 하에 참여할 수 있는 하이킹 인원이 한정되어 있고, 연중 3~4개월, 그것도 주말에만 사람이 찾는 편이라 녹아내리는 엄청난 빙하수가 충분히 희석하고도 남는다는 것.

알레취빙하는 몰입감을 더하는 영화처럼 검은 능선 사이를 900m에 이르는 거대한 두께의 얼음으로 길을 내어놓았다. 워낙 넓고 완만해 이토록 드넓은 빙하에선 사람이 점처럼 작게 보였다. 원형질적인 거대한 빙하와의 만남은 설악산이나 지리산 산행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오후가 되면서 햇살에 반사된 빙하가 휘황찬란했다. 직사광선과 빙하에 반사된 햇살이 상당히 강력해 잠시라도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눈이 피로해졌다.
거짓말 같은 풍경이 거짓말처럼 다가왔다. 지극히 먼 산처럼 보였는데, 한두 시간 후엔 그 아래 있었다. 한두 시간이 아니라 매일 34cm 움직이는 빙하의 흐름처럼 퍽 오랜 시간이 흐른 기분이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밀러 행성의 1시간은 지구에서의 7년이었다. 알레취빙하의 한 시간이 한국의 1년 같다. 잊혀지기 좋은 산이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콩코르디아산장이다. 벼랑 위 높은 산에 산장이 있었다. 프레디는 100년 전에는 저 산장이 있는 높은 곳까지 빙하였다고 한다. 산장을 높은 곳에 지은 것이 아니라 평지에 지었으나 급격히 빙하가 녹아 산 위에 매달린 상태가 된 것.
지금과 비교하면 1860년 당시 빙하는 3km 더 길었고, 200m 더 높았다고 한다. 갈수록 빠르게 빙하가 녹고 있어 2100년이면 알레취빙하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기후학자의 가설도 있다. 그래서인지 등산을 즐기지 않는 스위스 사람들 사이에도 '알레취빙하 1박2일 하이킹'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경험으로 꼽힌다.
벼랑 위 산장까지는 철계단을 따른다. 국내 산 암자에 있는 108개 번뇌의 계단을 뛰어넘는 숫자라 누구든 숨을 몰아쉬며 오르게 된다. 막강한 고도감의 공포에 힘이 들어가 피로감이 더해지는 것도 있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빨리 맞는 것이 낫다. 안자일렌과 크램폰을 벗었기에 연기를 뿜어내며 돌진하는 증기기관차처럼 스위스 사람들을 추월해 산장에 올랐다.

콩코르디아산장 생맥주와 달콤한 하룻밤
우리나라 국립공원 산장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풍경이다. 고급스런 음식이 끝없이 펼쳐진 뷔페마냥 알프스 빙하가 산장을 둘러쌌다. 산장 아래에는 거대한 빙하 광장이 있는데, 콩코르디아플라츠konkordiaplatz라고 불린다. 거대한 4개 빙하계곡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합수점이며, '콩코르디아'는 라틴어로 '합의와 이해, 조화'를 상징하는 로마 여신 이름이다.
산장 테라스 테이블에서는 생맥주와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맥주를 즐겨 마시는 편도 아닌데, 여기서는 신체의 모든 본능이 시원한 생맥주를 원했다. 일단 본능을 진정시키고, 장비를 풀고, 숙소를 배정 받았다.
풍성한 거품이 쌓인 생맥주는 고소하면서도 다채로웠다. 심장을 앗아갈 것 같던 계단과 하이킹 여정, 알레취빙하의 장관이 그 맛을 미화시켰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불타는 속을 '싸아'하는 효과음과 함께 가라앉히던 시원한 맛을 잊을 수 없다. 생맥주는 인터라켄의 대표적인 양조장인 루겐브로이 양조장에서 만든 '융프라우' 맥주였다.
저녁 6시 30분이 되자 산장의 모든 손님들이 모여 함께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스위스 전통 죽과 샐러드였다. 입맛에 딱 맞지는 않았지만 알레취빙하 한가운데 해발 2,850m 산장에서는 가릴 음식이 없었다. 뚝딱 음식을 비우고 알프스 전통 담금주 제네피와 생맥주를 들이켰다. 여름에 8시가 넘어야 해가 지는 이곳 특성상 낮술을 먹는 기분이었다. 을지로 노상 호프마냥 모두가 웃고 떠들며 유쾌하게 술과 식사를 즐겼다. 그야말로 모두 한마음이 되는 콩코르디아 여신의 가호를 받는 산장이었다.

푹신한 이불의 콩코르디아산장은 편안했다. 새벽 6시부터 다시 시작되는 빙하 하이킹, 스위스 일행들의 얼굴이 어제 만날 때와 달리 부스스했다. 헤드랜턴을 켜고 지그재그 비탈길을 따라 신중하게 내려갔다. 여러 팀이 줄지어 내려가는 통에 정체가 생겨, 서두를 수도 없었다. 어제와 달리 구름이 자욱하고, 빗방울이 흩날렸다.
줄거리가 완전히 달라지는 걸까. 비와 함께 진눈깨비도 떨어졌다. 바람이 합세해 방수 재킷을 입지 않으면 몸이 떨릴 정도다. 빙하로 내려가서 크램폰을 신고, 로프를 연결했다. 9명의 기차놀이가 다시 시작되었다.
날씨 탓에 쨍한 일출은 없었다. 흐릿하게 밝아오면서 어제와는 다른 인상이었다. '넓고 춥고 아름다웠다. 생존이 과제인 혹독한 행성의 얼음덩이를 수없이 오르내렸다. 바퀴가 지나간 자국 같은 퇴적층인 모레인Moraine이 패여 있어 오르내림을 계속 반복하며 걸어야 했다.

블랙홀 같은 검은 구멍과 워터파크 미끄럼틀 같은 빙하 물줄기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물이 쏟아지는 검은 구멍 앞에 선 프레디는 큼직한 바위를 가져와 떨뜨렸는데, 8초쯤 지나고 나서야 "풍덩"하는 소리가 들렸고 "우와!"하는 감탄을 동시에 내뱉었다. 상당한 깊이에 놀랐고, 빠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검은 구멍이 더 두려워졌다.
비바람 치는 빙하지대를 빨리 빠져나가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한 가이드 프레디는 빠르게 팀을 이끌었다. 앉아서 충분히 휴식하기보다는 개인이 알아서 간식을 먹고, 젖은 옷을 빠르게 갈아입을 잠깐의 시간만 주어졌다. 사람들이 지쳐갈 때 위험이 엄습했다. 5~6m 높이의 얼음 날등을 타고 걷거나, 점프를 해야만 넘을 수 있는 크레바스가 늘어났다. 프레디는 속도를 늦춰 주의 깊게 살피며 모두가 안전하게 지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빙하를 벗어나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 닿자, 비로소 홀가분하게 하네스와 크램폰, 로프를 풀어낸다. 산길을 따라 피셔알프fiescheralp로 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마을로 내려가는 하산길이다. 누가 마법을 부린 걸까? 겨울에서 봄으로 바뀐다. 초원과 야생화가 봄 분위기를 연출하고, 비가 그치더니 햇살이 쏟아진다. 동화 속 그림 같은 메르엘렌제호수를 지나고 긴 터널을 걸어 나가자 지구로 돌아온 듯했다.
평범한 산의 임도 위에 덩그러니 연착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기차역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인파 속에 섞여 사라질 때까지. 먼 별에서 느꼈던 차가운 촉감이 생생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interview
콩코르디아에서 만난 사람
알프스 4,000m대 산 44개 오른 등반가 이진기씨
백인들로 가득한 콩코르디아산장에 동양인이 들어왔다. 저녁식사 시간을 1시간 넘긴 시간. 하이커가 아닌 등반가이며 솔로 등반을 하고 온 고수 분위기였다. 등반가 이진기씨였다. 오직 산행으로만 닿을 수 있는 콩코르디아산장에 동양인이 숙박하는 일은 드문데, 한국인을 만날 줄은 몰랐다며 서로 반가워했다. 그는 알프스 전문가로 통한다. 국제산악연맹UIAA에서 인증한 알프스 4,000m 이상 봉우리 82개 중에서 44개를 올랐다. 몽블랑 정상만 20여 회를 올랐다. 2008년부터 알프스를 등반했고, 알프스에 매료되어 아예 눌러 살며 등반을 했다. 코로나 유행 기간에 귀국했다가 올해 7월에 알프스를 찾아 두 달 동안 혼자 등반 중이었다.
"히말라야는 등반을 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알프스는 효율적이에요. 예전에 파키스탄 등반을 갔는데, 한 달 동안 1,000m 등반을 했어요. 한참 차를 타고, 걸어가서, 텐트 치고, 날씨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이 있었죠. 유럽 알프스에선 1박2일 동안 1,000m 등반을 했어요. 시간이나 금전적인 면에서 더 효율적이에요."
그는 그로스그룬호른Gross Grunhorn(4,043m)을 홀로 등반하고 산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물었다.
"정상에 거의 다 왔는데 루트를 알려주는 표시가 없는 거예요. 불확실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혼자라서 두렵기도 하거든요. 그런 과정을 거쳐 정상에 올라서니, 이상적일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었어요. 기분이 좋아졌죠. 이때,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가장 위험한 때다'라는 어느 등반가의 말이 생각났어요. 그렇게 하산해서 길 표식을 다시 만났을 때 안도감과 함께 기분이 좋았어요."
알프스 4,000m대 솔로 등반이 지나치게 위험하지 않은지 묻자, 그는 "등반 루트가 있고, 가이드북에 난이도가 표시되어 있다"며 "감당 가능한 산을 간다"고 말하며 웃는다.

information
알레취빙하AletschGlacier 하이킹은 스위스 아웃도어협회 공인 가이드 동행 하에 가능하다. 크레바스가 있어 로프를 서로 연결하는 안자일렌을 하고, 발톱이 긴 아이젠인 크램폰이 있어야 한다. 크램폰 착용 가능한 등산화와 크램폰 등의 장비는 그린델발트에 자리한 아웃도어협회에서 대여 가능하다.
암벽이나 빙벽등반 경험이 없는 워킹산행 동호인도 가능하며, 지리산 천왕봉과 설악산 대청봉을 오를 체력만 있다면 등산 초보자도 가능하다. 콩코르디아산장에서 1박하는 이틀 일정이며 첫날, 융프라우요흐역에서 콩코르디아산장까지 8km를 걷는다. 완만한 내리막이라 쉽지만, 산장을 올라갈 때 긴 철계단을 올라야 한다.
둘째날 케이블카가 운행하는 피셔알프까지 14km 거리이며, 산장에서 8km를 걸으면 산길이 시작되고, 6km를 더 가면 하이킹이 끝난다. 1박2일 동안 22km를 걷는 하이킹이다. 케이블카 정류소 부근에 레스토랑이 있다. 콩코르디아 숙박과 저녁식사와 아침 식사 포함, 1인당 가이드 비용은 395스위스프랑(62만 원). 한 팀당 최대 8명까지 가능하다.
스위스 아웃도어 가이드 협회: outdoor.ch/en/outdoor- activities/aletsch-glacier-hike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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