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가 대박 났다고 지레 겁먹고 뒤로 빠진 각색자들이 용서되는 건 아니다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정년이>에서 신경 쓰인 게 한둘이 아니지만,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윤정년(김태리)과 홍주란(우다비)이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다방이다. 깔끔한 파란 목조 간판 위에 파스텔 티 룸이라고 쓰여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웬만한 방송국 스튜디오 만한 공간이 나오는. 1950년대 서울에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공간이 꼭 현실세계를 1대 1로 모방할 필요도 없음에도 이 공간이 거슬리는 건 이 다방이 한국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만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별로 좋지 못한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공간, 이 공간이 거쳐온 과거를 수치스러워 한다.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 할리우드에서 나오는 20세기 배경 영화를 아무 거나 하나 골라,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 영화와 비교해 보라. 거의 대부분의 한국 영화에서 배경이 되는 시대와의 심각한 단절이 느껴진다. 과거를 부끄러워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지금 한국 사람들이 옛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정년이>도 양쪽 다일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나는 오늘 전자를 지적하고 싶다. <정년이>가 그리는 서울은 새마을 운동 홍보자료처럼 검열된 공간이다. 지저분하고 가난해 보이는 모든 것은 은폐되고 삭제되었다. 마치 1950년대 주제 테마파크처럼 보인다. 어느 정도 빈곤의 흔적이 보이는 건 정년의 고향 목포뿐이다. 그 사람들은 이건 괜찮다고 생각한 거 같다. 서울이 아니니까.
이건 심각한 문제다. 여성국극이 당시 인기를 끌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전란 이후, 빈곤과 부당함과 고통에 시달리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고단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판타지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현실 세계의 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성국극을 다루는 드라마가 과연 힘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걸 잊는다면 그 공간은 심지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는다. 도시 공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늘 동시대의 현실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 이걸 제거한다면 플라스틱 장난감 정도의 미감밖에 남지 않는다.
<정년이>가 은폐한 것은 표면적인 빈곤뿐만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멈추어 서서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움찔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일단 다 잘라낸다. 예를 들어 원작에서 정년이의 가요 스승인 패트리샤는 가정 폭력의 희생자이고 원작은 이를 가감없이 정확하게 다룬다. 하지만 드라마는 패트리샤(이미도)를 대충 '이혼녀'로 설정하고 그 사연을 묻어버린다. 남장을 하고 다니며 성별이분법적 관점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정년이에게 가르쳐주는 고사장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 드라마에서 남장은 오로지 환상 속의 왕자님을 추구하는 남역배우들에게만 허용된다.
이 공허함의 절정을 이루는 건 방영 전부터 논란을 일으켰던 권부용 캐릭터의 삭제이다. 원작을 안 읽은 사람들에게 설명한다면 이건 로빈 후드 이야기를 하면서 마리안을 지우는 것과 같다. 부용 없이 진행되는 이야기가 꽤 부분을 차지하지만 결국 있어야만 이야기가 완성된다. 아니, 부용은 마리안보다 더 중요하다. 원작의 후반부에 이르면 그때까지 이어지던 주인공 정년의 서사는 부용의 존재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쓰여지고 그것의 최종 종착지는 클라이맥스인 '쌍탑전설'이다. 그렇다. 그 국극의 저자가 권부용이다.
권부용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하는 캐릭터이다. 주인공의 연애 상대이기도 하지만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 호모포비아에 깔려 무시되고 잊힌 여성 예술가를 대표한다. 무엇보다 부용은 <정년이>가 다루는 여성 국극의 세계를 확장한다. 부용은 관객이고, 비평가이고, 무엇보다 작가이다. 이야기를 담은 공연에서 그 이야기를 누가 썼는가는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드라마는 이 캐릭터를 잘라냈다. 이건 굉장히 비정상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단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호모포비아. 공식적인 이유는 12부작 안에서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서라지만 당연히 그건 설득력이 없다. 일단 tvN으로 넘어가기 전인 MBC 시절부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용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3시간 안쪽인 창극 버전에서도 부용은 멀쩡하게 존재했다. 그리고 12부작은 결코 짧은 편이 아니다.
드라마가 원작에 꼭 충실하라는 법은 없다. 더 나은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그 더 나은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더 나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어서 부용을 자른 게 아니라 일단 잘라놓고 핑계를 찾았던 것이다. 드라마 각본에는 이런 식으로 각색된 텍스트의 절단면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예를 들어 원작의 '쌍탑전설'은 부용의 작품이라는 데에서 의미를 갖고 그를 위해 설계되었다. 그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제거되면 텅 비어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드라마는 끝까지 그 공연이 특별한 이유를 찾으려다 실패한다.
이 드라마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비유는 추리소설의 살인사건 같다는 것이다. 특히 부용을 구성하던 행동과 대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갈 때는 거의 토막살인의 현장 같다. 그리고 각본은 마치 이 살인을 은폐하기 위한 작전과 같다. 시체를 어디다 묻고, 어떻게 거짓증언으로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부용이 당당하게 자신의 성적지향성을 밝히는 퀴어 캐릭터였을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여성예술가들이 겪은 부당함을 고발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이 은폐는 더더욱 추리소설 같다. 살인은 저질러졌고 증언은 묻혔다. 그리고 다들 그걸 모른 척한다. 퀴어 요소들이 다 지워졌냐고? 아니다. 적당히 오타쿠들이 착즙할 정도는 남겨놨다. 시청자들이 알아서 채우라고 떡밥을 던져주고 각색자들은 비겁하게 뒤로 빠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 결과물은 화제성과 시청률에서 모두 대박을 냈을지는 몰라도 비겁하고 안전한 선택에 따른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원작을 이루고 있던 모든 주제는 날아갔다. 퀴어 캐릭터는 살해당했고 페미니즘 메시지를 구성하던 모든 재료들은 증발했다. 그래놓고 그냥 여자들이 많이 나오는 '여성서사'이니 만족하라고 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더 어이가 없는 것은 2024년은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때라는 것이다. 이미 10여년 전에 <바람의 화원>은 두 여성 콤비에게 커플상을 주었고 아무도 뭐라지 않았다. 얼마 전엔 주인공 중 한 명이 커밍아웃을 한 <마인>이 있었고 다들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지금의 드라마 시청자들에게 권부용의 존재는 특별히 위험하지도 도전적이기도 않다. 그런데도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은 비겁함과 변명 속으로 달아났다.
드라마 <정년이>이 망가질 수 있는 길은 많았다. 모든 창작과정이 그런 위험을 품고 있다. 아무리 재료와 의도가 좋다고 해도 만들기 직전까지는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고려한다고 해도 드라마 <정년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비겁함'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만들지 않는 것이 낫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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