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같은 생애 첫 사이영, 35세 세일의 2024년은 왜 위대한가
심진용 기자 2024. 11. 21. 15:16
크리스 세일(35)이 지난 1월 애틀랜타와 2년 3800만 달러 연장 계약을 맺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애틀랜타가 가능성 낮은 도박을 했다고 생각했다. 끝도 없는 부상으로 지난 5년 동안 300이닝도 못 던졌던 30대 중반 노장이, 온전히 한 시즌을 소화할 수나 있겠느냐는 우려가 나오는 게 당연했다. 풀시즌도 장담하지 못하는데, 사이영상 같은 기대는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됐다. 세일이 2024시즌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수상자로 21일(한국시간) 선정됐다. 1위표 30장 중 26표를 쓸어 담았다. 생애 첫 사이영상이다. 올해 세일은 18승 3패에 평균자책점 2.38, 225탈삼진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며 일찌감치 최고 투수의 자리를 예약했다.
사이영상 없던 최고의 투수, 35세 생애 첫 사이영
세일의 2024년이 위대한 건 그저 역대 35세 이후에 생애 첫 사이영상을 차지한 역대 6번째 투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광의 20대를 보냈던 최고의 투수가 30대로 접어들자마자 처참하게 추락했다. 악몽 같은 세월이 5년이나 이어졌고, ‘재기 불가’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메이저리그(MLB) 역사를 통틀어도 그처럼 낙차 큰 추락과 극적인 부활의 사례를 찾기는 쉽지가 않다.
미국 스포츠통계전문업체 엘리아스 스포츠는 세일에 대해 “사이영상 투표에서 5년 연속 5위 안에 들었다가, 이후 5년 연속 순위권 바깥으로 빠졌고, 그리고 사이영상을 수상한 역사상 최초의 선수”라고 설명했다. 롤러코스터 같았던 그의 지난 10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기록이다. 세일은 23세 되던 2012년 사이영상 6위를 받았고, 2013년부터는 6년 연속 5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수상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자기 페이스만 유지한다면 언젠가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예상이 많았다.
그러나 30세 되던 2019년부터 악몽이 시작됐다.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타구에 맞아 손가락이 부러졌고,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손목이 부러졌다. 보스턴 시절 구단 관계자가 “누군가 세일의 저주 인형을 가지고 있다”고 푸념할 만큼 불운했다. 매년 대체선수대비승리기여도(WAR) 5 이상씩 꼬박꼬박 적립했던 선수가, 부상으로 날린 5년 동안 모두 합쳐 4.7에 그쳤다.
부활한 올 시즌 세일의 WAR은 6.2다. 데뷔 이후 3번째로 높은 기록이고 2018년 6.5 이후 6년 만의 WAR 5 이상 시즌이다. MLB닷컴은 “1945년 이후로, 25세 시즌과 35세 시즌에 각각 WAR 5이상을 기록한 역대 10번째 선수”라고 전했다.
부상 악몽 속 식단도 볼배합도 모두 바꿨다
세일의 극적인 부활 비결은 첫째도 둘째도 건강이다. 시즌 막판 허리 통증으로 포스트시즌에 등판하지 못했지만, 그전까지 부상 없이 건강하게 시즌을 소화했다. 거저 얻은 결과가 아니었다. 아내의 권유로 식단부터 바꿨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글루텐을 끊었다. 가공식품을 피했고, 비타민을 풍부하게 섭취했다. 세일은 시즌 중 한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에는 비행기에서 감자칩 20봉지를 먹었고, 매주 몇 번씩 맥도날드와 타코벨을 갔다. 몇 년간 계속 부상 문제를 겪으면서 더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의지만으로 부상을 피할 수는 없다. 타구에 맞아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은 선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넋 놓고 불운을 탓할 수만도 없다. 오랜 부상의 세월 속에서 세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았고, 비로소 올해 그 결실을 봤다.
건강한 세일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평균 152㎞ 구속을 회복했고, 슬라이더는 오히려 더 좋아졌다. 10년 전 18.4%에 불과했던 슬라이더 비율을 40.3%까지 끌어올렸다. 올해 잡은 225개의 삼진 중 124개를 슬라이더로 잡아내는 동안 홈런은 단 1개만 맞았다. 슬라이더 피안타율이 0.171, 헛스윙 유도 비율은 42.7%에 달했다.
세일이 포심보다 슬라이더를 더 많이 던진 건 2019년 이후 처음이다. 커리어를 통틀어도 그 두 번이 전부다. 건강을 회복했고, 자신이 가장 위력적일 수 있는 피칭 디자인을 새로 찾았다. 그 과정에서 부단한 연구와 노력이 있었던 건 물론이다.
식단을 바꿨고, 건강을 회복했다. 볼 배합도 재구성했다. 올해 세일이 극적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결국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의지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일은 지난 8월 한 인터뷰에서 최근 몇 년을 ‘열차 사고’에 비유하며 “솔직히 딱 그런 느낌이었다. 완전히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그는 한때 은퇴까지 생각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끝까지 한번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랜디 존슨과 크리스 세일의 51번
세일은 올 시즌을 앞두고 등번호를 51번으로 바꿨다. 역대 최고의 좌완 투수 랜디 존슨의 등 번호다. 세일은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를 제외하고 존슨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투수”라며 “그를 기리기 위해 번호를 바꿨다. 올해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시즌이다. 역대 최고 왼손 투수의 번호를 달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존슨은 전 세계 모든 좌투수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선수다. 그러나 세일에게 존슨은 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35세 되던 1999년 생애 2번째 사이영상을 차지했고, 2002년까지 4시즌 연속 그 영예를 독식했다. ‘올해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세일에게 45세까지 현역으로 뛰었던 존슨은 그야말로 최고의 롤모델이다.
모든 사이영상 수상자는 위대하다. 그러나 길었던 악몽을 끊고 화려하게 부활한 2024년의 세일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위대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세일은 “(과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 순간을 더 깊이 감사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젊었을 때는 마운드 위에서 던지고, 성공을 거두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힘든 시기를 겪고 나면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고 했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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