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트럼프 스톰? 오히려 기회"…정유사, 중동 의존 낮춘다

오현우/김우섭/김형규 2024. 11. 2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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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대응
미국산 원유 수입 늘린다
정유사 '중동 편중' 리스크 해소
정부는 통상 협상 카드로 활용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정부와 SK에너지 등 국내 정유 4사가 미국산 원유 수입을 대폭 늘리는 방안을 추진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석유 수출 확대’ 선언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정부는 미국산 원유 수입 확대를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를 낮추는 협상 카드로 활용하고, 정유사는 중동에 편중된 원유 도입처를 다변화하는 계기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20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를 대상으로 국가별 원유 도입 현황과 수입처 다변화 가능성 등에 관한 현황 파악에 들어갔다. 산업부 관계자는 “트럼프 정부와의 통상 협상에 대비해 미국산 원유 수입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며 “그 첫 단계로 현황 파악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1기 때 미국의 통상 압박으로 2016년 0.1%이던 미국산 원유 비중이 2020년 10.2%로 수직 상승한 점을 들어 현재 16.7%인 이 비중이 20~30%로 올라갈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물류비와 관세를 포함한 도입 비용 측면에서 미국산 원유 가격은 수입 원유의 70%를 차지하는 중동산과 큰 차이 없다. 19일 종가 기준 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69.53달러로 두바이유(72.53달러)보다 낮다. 다만 미국산 원유가 중동산(중질유)과 다른 경질유라는 점에서 도입 물량이 증가하면 정유사가 설비 변경 등에 상당한 돈을 투입해야 하는 것은 부담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유사들도 리스크 헤지를 위해 원유 도입처 다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라면서도 “하지만 국가 차원의 협상 카드로 쓰는 만큼 정부가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정유사 톱4들 도입 검토
정부, 두바이유 중심 정제설비 교체 등 도입처 다변화 지원 늘려야

원유 도입처 다변화는 국내 정유업계가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다.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가 들여오는 원유 가운데 중동산이 70.8%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편중돼 있어서다. 전쟁과 천재지변 등으로 언제든 공급처가 끊어질 가능성이 있는 데다 가격 협상 및 도입 조건 등에서도 중동 산유국에 끌려갈 수 있는 구조란 얘기다.

정부와 정유 4사가 ‘도널드 트럼프 2.0’ 시대를 맞아 미국산 원유 수입 확대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석유·가스 수출 확대’를 주요 정책으로 내건 만큼 정부는 미국산 원유 수입 확대를 협상 카드로 쓸 수 있다. 하지만 항만 등 미국의 원유 수출 인프라가 취약하고 국내 정유 설비가 중동산 중질유 위주로 설계됐다는 점에서 미국산 원유 수입량을 큰 폭으로 늘리기는 쉽지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

 ○원유 가격은 대동소이


정유사가 부담하는 도입비용 측면에선 미국산 원유와 중동산은 큰 차이가 없다. 현시점에선 미국산이 저렴하다.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은 19일 기준 배럴당 69.53달러, 중동 두바이유는 72.53달러다. 미국산 원유 운임이 배럴당 약 4달러로 중동산(약 2달러)보다 높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덕에 관세가 없다는 점에서 전체 도입비용은 배럴당 3달러 정도 덜 든다. 중동산 원유에는 3% 관세가 붙는다. 하지만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증산을 결정하면 가격은 곧바로 뒤바뀐다.

우리 정부가 중동 외 미주,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서 원유를 들여올 때 추가되는 운송비 차액을 대신 내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산 원유의 매력은 더 커진다. 정부는 원유 공급 안정을 위해 1982년부터 ‘원유 도입처 다변화 지원 제도’를 시행해 왔다. 연간 2000억원을 여기에 쓰고 있다.

그럼에도 중동산 원유 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2021년 59.8%에서 올해 1~10월 70.8%로 늘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인프라.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은 석유 수출로 먹고살다 보니 항만 등 수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반면 미국에선 2018년 증축한 루이지애나 항구에서만 원유를 수출하고, 이마저도 200만 배럴 규모 유조선 한 척만 접안할 수 있다. 파나마운하를 통과하지 못해 남미 대륙을 우회해야 하는 탓에 운송 기간도 중동(22일)보다 두 배 긴 40일에 달한다.

두 번째는 국내 정유업계 설비가 탄소 함유량이 많은 중동산 중질유(벙커C유 등) 중심으로 설계됐다는 점이다. 미국은 셰일 오일에서 추출하는 경질유(휘발유 등)를 주로 수출하는 만큼 국내 설비와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정유 4사, 美 원유 확대 검토

정유업계도 정부 정책에 발맞춰 미국산 원유 도입 확대 가능성 점검에 들어갔다. 몇몇 업체는 정부가 설비 변경비용 등을 지원하면 미국산 수입 비중을 늘리는 게 손해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수입처가 다변화되면 OPEC 증·감산 회의 때마다 수익이 출렁이는 리스크를 해소할 수 있다”며 “원유 가격 협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업체별로 미묘한 차이가 감지된다. 미국 석유기업 셰브런과 합작한 GS칼텍스는 미국산 원유 확대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하다. 이 회사는 2016년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도 가장 먼저 미국 원유 200만 배럴을 들여왔다. 오래전부터 수입처 다변화에 나선 SK에너지도 미국산 원유 수입 확대에 부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 최대 석유회사 아람코의 자회사인 에쓰오일과 아람코가 지분 17%를 보유한 HD현대오일뱅크는 난감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람코 등과 원유 장기 도입 계약을 맺은 만큼 갑작스럽게 비중을 확대하기 어려워서다. 중장기적으로 미국산을 늘리면 중동과의 협력 관계가 어그러질 수 있는 점도 부담이다.

업계 관계자는 “원유 도입처 다변화 지원금 확대, 원료용 중유 개별소비세 폐지, 설비 변경비 지원 등 인센티브가 동반돼야 업체들이 미국산 원유 수입을 적극적으로 늘릴 것”이라며 “인센티브가 적으면 장기 도입 계약이 아니라 현물시장에서 일부 미국산 물량을 사오는 단발성 협력에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오현우/김우섭/김형규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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