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재등장과 기후변화 서사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한겨레 2024. 11. 2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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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투모로우’의 한 장면.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

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20년 가까이 기후변화 문제를 보도하면서 고민하는 게 있다. 기후변화는 정교함을 요구하는 기사의 서사로 보여주기 어렵다는 점이다. 세계의 기후변화 대응이 미진한 이유는 서사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거나, 서사의 방향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점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을 포함해 세계 언론이 기후변화의 실상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때는 2000년대 들어서다. 초기의 보도 경향은 기후변화의 최전선에 가서 실상을 보여주고 경고했다. 나는 북극과 투발루 그리고 남극을 다녀왔는데, 기자들이 현상을 거두절미하고 단순화하면서, 주민들 삶의 복잡성을 놓친다는 게 께름칙했다.

투발루 사람들은 해수면 수위가 빠르게 높아져서, ‘왱~’ 하는 사이렌을 듣고, 국토를 허겁지겁 떠나는 걸까? 선진국 시민들은 대개 그런 이미지를 상상하지만, 가서 보면 그렇지 않다. 투발루 사람들은 과거부터 이민을 선호했다. 변변한 공장은 물론 시장도 없을 정도로 이 나라에는 경제적 전망이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뉴질랜드에서 미등록 노동자가 되어 돈을 보내 가족을 먹여 살린다. 기후변화로 인해 벼락처럼 투발루에 이런 변화가 내리친 게 아니다. 기저에는 사회경제적-심리적 요인들(송금 경제로 지탱되는 국가경제, 글로벌 소비주의 문화의 침범, 재난에 대한 심리적 공포)이 자리 잡고 있다.

2017년 캐나다 북극권 서머싯섬에서 삐쩍 마른 곰이 내일이라도 죽을 것처럼 걸어가는 영상이 세계를 사로잡았다. 놓칠세라 ‘내셔널지오그래픽’은 기후변화를 경고하는 콘텐츠로 활용했다. 며칠 뒤, 과학자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기후변화 때문에 굶주렸다기보다는 암 질환 같은 병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을 거라는 얘기였다. 이 매체는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기후변화’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대개 사람들은 기후변화가 절벽처럼 다가올 거로 생각한다. 반면, 내 생각에 기후변화는 싸구려 장비를 찬 대원들부터 낙오하는 죽음의 산길과 비슷하다.

‘기후변화=절벽’을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콘텐츠로 할리우드 영화 ‘투모로우’(2004)를 꼽는다. 북극의 바다얼음이 녹아 해류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고 미국 동부에 빙하기가 도래한다는 이야기다. 과학적 원리는 맞는다. 그런데, 중요한 게 잘못됐다. 어떻게 빙하기가 한 달 만에 오는가?

기후변화의 절박성에 대해 대중을 계몽하려는 언론인은 이런 스토리텔링을 ‘숭고한 과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차기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주변의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은 이런 약점을 ‘거짓말’이라며 파고든다. “거 봐! 기후변화는 과장이라고”라면서 과학자와 언론인과 환경운동가의 주장을 ‘되치기’한다.

기후변화는 곧잘 재난이 휩쓸고 간 폐허, 찰나의 폭발적 이미지, 단 하나의 사건으로 형상화되지만, 이런 이미지는 전체 그림의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기후변화는 ‘느린 재난’(slow disaster)에 가깝다. 느린 재난은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 이산과 빈곤, 붕괴로 나타난다. 사건은 기후변화라는 단일 원인으로 소급되지 않는다. 대신 기후변화는 사회경제적 환경을 투과해 고통을 배가하고 절망에 빠지게 한다. 순수하게 자연적인 재난은 없다. 산업화의 누적된 부작용이자, 개도국에 대한 착취의 결과이고, 부자와 가난한 자, 젠더, 종에 따라 불균등하게 증폭되는 고통이다.

언론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기술적 해법에 기대어 기후위기에서 벗어날 거란 근거 없는 낙관주의, ‘인류 멸종’ 같은 종말론적인 비관주의에서 모두 벗어나야 한다. 포스트 휴머니즘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사변적 우화’를 만들자고 말한다. 전형적인 기후변화 서사에서 비가시화되거나 수동적인 대상에 머무는 사람들, 주변인, 비인간 동물들에게 이야기를 돌려주면 새로운 가능성이 움틀 거라고 한다. 홍수와 가뭄이 일상적인 높은 문맹률 나라의 시민과 투발루 주민과 북극곰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이들을 피동적인 존재로 그려왔던 언론인들에게 낯선 제안이다. 그러나 낯선 시대에는 낯선 해법이 필요하다. 우리만큼 낯선 시대를 사는 존재가 지구 역사에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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