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사람들, 절박한 정치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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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멀라 해리스가 미국 대선에서 진 이유를 이 글에서 모두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해리스는 경합주인 위스콘신주와 미시간주,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최소 2만9천에서 최대 13만9천여 표 차로 패배했는데, 진보적 유권자층이 해리스를 위해 투표장에 더 나왔다면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다.
이런 어중간함은 비단 해리스나 미국 민주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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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카멀라 해리스가 미국 대선에서 진 이유를 이 글에서 모두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해리스의 패배가 어중간한 리버럴 정치의 한계를 보여줬다는 점에 대해선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전쟁에 대한 어중간한 대처다. 전세계가 인공지능(AI)으로 작동하는 무인 살상무기까지 동원해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는 이스라엘군의 행태를 비판하는데,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이스라엘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무기 지원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를 비판하고 나선 ‘지지 후보 없음 운동’(언커미티드 운동) 등 진보적 유권자층이 무기 지원 중단 선언을 요구했지만 해리스는 끝까지 침묵했다. 해리스는 경합주인 위스콘신주와 미시간주,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최소 2만9천에서 최대 13만9천여 표 차로 패배했는데, 진보적 유권자층이 해리스를 위해 투표장에 더 나왔다면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다.
다음은 저소득 노동계층의 절망에 대한 어중간한 대처다.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는 대선 직후 “노동자 계급을 버린 민주당이 노동자 계급에 버림받은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라며 “오늘날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미국 노동자의 실질 주당 임금은 50년 전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기득권 정치세력은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을 정치적 피해망상, 외국인 혐오, 백인 기독교 우파, 인종주의, 여성혐오 탓으로 돌리고 있다. 틀렸다”며 “트럼프는 공장이 문을 닫고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져버린 지역에 사는 수백만 노동자의 표심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이번호 특집) 해리스는 그들의 표심을 잡는 데 실패했다는 얘기다.
이런 어중간함은 비단 해리스나 미국 민주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2024년 7월 총선에서 제러미 코빈 등 당내 좌파를 내치고 ‘제3의 길’을 앞세우며 집권한 영국 노동당 키어 스타머 총리의 지지율은 석 달 만에 “영국 현대사의 어떤 총리보다 큰 폭으로 하락”(텔레그래프)했다. 보수당의 전임 총리 리즈 트러스와 리시 수낵이 감세와 긴축 정책으로 몰락했는데, 스타머 정부 역시 재정 적자를 줄이겠다며 연금 수급자들에게 매년 주던 200~300파운드(35만~53만원) 정도의 겨울철 난방비 지원을 끊겠다고 발표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문제는 리버럴 정치의 이런 어중간함에 지친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극우 정치를 대안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경제적 양극화 사회에서 일자리를 잃고 치솟는 물가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처한 ‘절박한 시기에는 절박한 조치가 필요’한데, 어중간한 정치는 절박한 사람들의 분노만 살 뿐이다. 트럼프의 재집권, 스타머 총리를 넘어서고 있는 극우 성향 나이절 패라지 개혁당 대표의 지지율이 그 결과다.
먼 나라의 얘기만도 아니다. 자영업자들이 무너지고 개인회생 신청이 급증하고 있는데 여전히 긴축 재정을 고집하는 윤석열 정부를 보면서도 중도층 지지를 얻겠다며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를 선언하고 종합부동산세와 상속세의 과세 대상자를 줄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이재명 대표의 더불어민주당도 어중간한 길을 가는 건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데도 이재명 대표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건 이런 이유 때문 아닐까.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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