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낯선 사이]기민과 탄핵
2016년부터 시작된 ‘촛불시위’에 연인원 1700만명이 참여했다. 이듬해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진했다. ‘촛불’은 전국 각지에서 장기간 대규모로 이루어진 자발적 힘이었다. 당시 ‘여론 주도층’은 이 집회의 동력과 원인에 대해 많은 토론과 분석을 시도했다. 구한말 만민공동회가 역사적 기원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1980년대 ‘변혁 이론’ 중 하나였던 제헌의회 그룹(CA)의 이론적 전제는, 일반 대중은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으므로 해방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직업 혁명가의 지도가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이 가장 경계한 것은 대중 추수(追隨)주의였다. ‘촛불’은 이들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역사다. 8년 전 집회에 참가한 이들은 귀가하지 않고 콘서트를 즐겼으며 도로를 점거하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자체 토론을 벌였다(물론 성추행과 절도도 있었다). 사회운동 세력은 대중을 동원하거나 조직하기는커녕, 사람들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조차 몰랐다.
‘주간경향’ 1603호(2024·11·11~11·17)의 커버스토리는 (윤석열 대통령은) “남은 절반 마칠 수 있을까”이다. 지금 정국의 최대 사안이다. 탄핵이냐, 하야냐, 임기 단축 개헌이냐, 의견이 분분하다. 자발적 하야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국민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때처럼 “이게 나라냐”며 분노했을 때와 달리 “결국, 이게 나라구나”라고 포기할까? 대한민국은 고민 중이다.
어쨌든 중론은 탄핵의 동력이 8년 전과 다르다는 것이고, 여당은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는 그나마 한 명의 대통령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부부 대통령’이다. 모든 사안이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탄핵을 해봤자…”라는 피로감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윤 대통령이 물러난다고 세상이 나아질까?라는 의문에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의 기억과 먹고사는 일상이 너무 고달프다.
국민이 아니라 기민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류학자 엄기호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국가는 노동을 재생산하는 것을 국가 정책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노동의 재생산은 국가의 부를 생산하는 데 오히려 짐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 국가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탈락시켜 ‘쓰레기’로 만들고, 그 쓰레기를 합리화하는 데 더 초점을 두고 있다. (…) 요컨대 노동의 영역으로 편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네가 왜 잉여가 되고 쓰레기가 되어야 하는지 납득시키는 것이 국가의 중요한 목적이 된 것이다. 이 통치의 성공과 더불어 남성들은 성공적으로 잉여 처리된다. 이 잉여들은 스스로를 국민이라고 느낄 수 없다. 다만 국민의 짐, 시민의 덤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대다수 남성들에게 대단히 낯설다. 이들은 언제나 자신이 국민이며 정치적 주체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볼 때 ‘촛불’에서 이들이 ‘국민’이라는 기표에, ‘시민’이라는 호명에 매혹되고 힘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 <유동하는 공포> <새로운 빈곤 -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푸어>도 이러한 현상을 다룬다. 또한 이미 28년 전인 1996년, 프랑스에서 메디시스상을 수상한 비비안느 포레스테의 <경제적 공포 - 노동의 소멸과 잉여 존재> 역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분석한 책이다. 출간 직후 17개 언어로 번역되어 마르크스 이후 가장 많이 팔린 경제서로 알려져 있으며 전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옥은 비어 있고 악마들은 다 우리 곁에 있다.” <경제적 공포 - 노동의 소멸과 잉여 존재>는 부제가 주제이다. 이 책은 우리가 매일 실감하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경제가 성장할수록 고용은 줄어든다”는 상황이 인류에게 미칠 영향을 분석한다. 지은이는 자본주의가 지구를 삼켜버리고, 인간은 인간성 밖으로 추방된 시대의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다.
나는 위 분석들에 동의한다. 불과 8년 사이에 한국 사회는 국민이든 시민이든, 주체들이 소속하고자 했던 국가(의 역할)가 사라졌다. 이는 미국에서 왜 극도의 인종주의자이자 성차별주의자인 트럼프에게 유색인종과 적지 않은 여성들이 투표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가져온 극단의 양극화와 그 통치 체제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국민 대신 자본을 선택하고 자본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다. 국민은 관심 밖, 잉여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이들, 기민(棄民)은 이 거대한 비극에 저항하기보다는 아무도 믿지 않으며 오로지 자기 생존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바로 옆의 눈에 보이는 타자(이주민, 여성 등)를 혐오한다. 한국 사회의 ‘이대남’ 현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20대 남성을 ‘버린’ 주체는 국가이지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기민들의 탄핵은 가능할 것인가
미국의 진보적 중산층은 캐나다로 이주하거나 트럼프 임기 내내 미국을 떠나는 4년짜리 크루즈 여행을 고민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나는 한국인들의 국가관은 더욱 복잡하고 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외세로 인해 늘 ‘주체 역량’을 전략적으로 사고해야 했던 굴곡의 근대화 역사 때문이리라.
한국인들의 심리에는 애국주의, 국민주의도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왕조)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1994년에 출간된 조한혜정의 <탈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2>에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나온다. ‘공중전화 시절’에 잔돈이 남으면 한국 사람들은 뒷사람을 위해 전화기를 끊지 않고 전화통 위에 올려놓는데, 일본 사람들은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일본 사회는 한국인의 이러한 문화를 “인정 어린 미풍양속”으로 평가했는데, 조한혜정의 분석은 다르다. 한국의 경우 공중전화에 남은 돈은 국가에서 장애인 복지 사업을 위해 쓰게 되어 있는데, 일본 국민은 국가가 그런 일을 하리라 믿기에 돈을 ‘기부’하지만 우리는 국가에 돈을 기부하길 싫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낸 세금의 혜택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으며, 오히려 국가에 바친 세금의 상당 부분이 권력자가 부정으로 축재하거나 더 나쁜 일을 저지르는 데 쓰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국가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믿을 것은 가족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버전으로 말하면,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
내 생각에 현 정권에 대한 탄핵 국민 행동 여부는 ‘주체 역량’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그다음 정부, 다른 세상에 대한 ‘기대감’에 따라 다르다. 정치평론가 이철희는 최근 <나쁜 권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출간 인터뷰에서 “탄핵의 문은 열렸지만, 야당은 서두르지 말라”고 경고한다. 국민들이 현재 수권세력으로서 야당에 대한 신뢰가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은, 야당 역시 국민을 저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민의 생각을 모르고 야당(들)이 탄핵 국면을 주도하는 것은 여야, 그들끼리의 정쟁으로밖에 안 보일 것이고 성공하지도 못할 것이다.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가 폐지되자 여당 의원들이 일제히 자축(?)과 의기양양한 어투의 현수막을 거리에 내걸었는데, 그 표현은 나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금투세 폐지, 해냈습니다!” 뭘 대단하게 해냈다는 말인가. ‘해냈다’. 이 표현은 어렵고 힘들지만 의미 있는 일을 성취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마치 무슨 억압에서 누군가를 해방시켰다는 말로 들린다. 금투세 폐지에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보다, 그렇지 않은 국민들이 더 많다. 금투세 폐지가 그리 대단한 민생 사안인가. 금투제 폐지는 국가가 국민을 버리는 기민 행위에도 나름 완급 조절을 한다는 사례일 뿐이다. 그나마 야당은 지난 정권에서 자신들이 발의했던 법을 스스로 포기했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 이렇게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이들은 처음이다. 이전의 군사정권은 국민들과 싸웠다. 국민들도 그들과 싸웠다. 그러나 지금 정권은 국민에게 관심이 없다. 자신들이 대통령 부부라는 사실만 중요하다. 게다가 현재 기민들은 극도로 분열되어 있다. 자신이 기민인 줄도 모르고 자신을 버린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 자신이 기민인 줄 알기에 분노하여 거리에 나설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과연 어떤 국민들이, 아니 어떤 기민들이 이 지옥에서 살아남을까.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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