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의 관점에서 바나나와 ‘애플’은 연결되어 있다[윤지호의 투자, 함께 고민하시죠]
1980년대 바나나는 부유한 집에서나 맛볼 수 있는 비싸고 귀한 과일이었다. 바나나를 키우기에 한국의 기후가 적절하지 않았고, 제주도 비닐하우스 재배만으로는 국내 수요를 충족하기 힘들었다. 필리핀에서 대량 생산된 바나나가 1980년대 중반 이후 들어오면서 가격이 좀 내려갔지만 여전히 비쌌다.
바나나를 누구나 싸게 먹게 된 계기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다. 협상 후 바나나는 대량 수입되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저렴해졌다. UR은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진행된 다자간 무역협상으로 격렬한 쌀 개방 반대 시위를 촉발했던 사건으로 기억되지만, 한국 수출기업에는 성장의 기점이 되었다. UR 협상 타결의 최종물로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했고, 관세장벽이 낮아지면서 한국의 자동차와 반도체 산업은 세계로 나아갔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서 중국과 미국이 동반 성장하는 차이아메리카 시대가 열리자, 글로벌 교역량이 급증하는 국면에서 한국은 다디단 ‘열매’를 따먹게 된다.
WTO 체제는 세계화를 추구한다. 자유무역이 경제 성장을 불러온다는 믿음으로, 경계선 비용을 최소화해야 작동되는 체제다. 인간의 본성은 고립이 아닌 이동이다. 같은 사람속(호모)이지만 네안데르탈인은 유럽에 머물다 멸종했고, 호모사피엔스는 원하는 것을 찾아 아프리카를 떠났기에 살아남았다. 좋은 기후와 사냥감을 따라 이동했듯이, 인류역사는 교역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을 쟁취했다. 위도와 경도에 따라 기후는 다르다. 당연히 기후에 따라 자라는 식물과 동물도 다르다. 바나나의 경우처럼 다른 지역에서만 자라는 먹거리를 손에 넣기 위해 교역이 시작됐다. 고대 동서양을 지배했던 한나라와 로마제국도 실크로드로 연결되어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고, 향신료를 얻기 위한 도전이 대양을 건너 세계를 이었다. 기술 진보와 생산성 혁명은 교역이 촉발한 것이다.
바나나 같은 먹거리는 아니지만 애플(아이폰)도 다르지 않다. 스티브 잡스는 전화기에 컴퓨터, 사진기를 장착하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현실화했다. 아이폰은 네덜란드, 일본, 스위스 등의 혁신 기술을 적용했고, 보다 싼 노동력을 지닌 중국의 폭스콘에서 최종 조립, 생산한다. 아이폰을 뜯어내면 미국 안에서 만들어진 부품은 많지 않다.
트럼프는 이를 지적한다. 공공연하게 아이폰을 미국 내에서 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내 공장 제조로 고용을 창출하고 미국 안에서 부품을 조달하라고 압박해왔다. 아이폰을 미국 내에서 생산할 수는 있었다. 그러려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만들어온 부품을 미국 안에서 조달해야 한다. 애플도 미국 내 생산을 계획했지만, 제품별로 나사 공급마저 원활하지 않음을 알고 더 진행하지 않았다. 아이폰의 경쟁력은 부품과 기술을 교역을 통해 확보함으로써 비용 대비 높은 생산성을 유지해온 데 있다.
미국이 다시 공장을 짓고 있다. 미국의 견조한 경기모멘텀의 요인 중 하나가 바이든의 리쇼어링이었고, 트럼프도 다르지 않다. 트럼프는 법인세 인하와 보편 관세 입장에서 리쇼어링을 추진하고 있다. 관세를 내기 싫다면 미국인을 고용해 아웃소싱 없이 미국 안에서 생산하라고 한다. 결국 트럼프의 의도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관세 없는 미국 안에서 제조하고 법인세 인하 혜택을 누리라는 것이다. 애플은 이제 중국에 비해 훨씬 더 비싼 임금을 주고 미국에서 노동자를 고용해야 한다. 올라간 임금만큼 보다 싼 부품을 찾아야 하는데, 이미 많은 부품이 아시아나 인도로 넘어가 있다. 미국 내 생산으로 생산원가가 오를 수밖에 없다면 이전과 같은 마진을 확보할 수 있을까 우려도 된다.
2024년 3분기 워런 버핏은 애플 주식을 더 줄였다. 2016년 매수를 시작한 이후 보유한 주식의 40%에 달했던 최선호 주식을 계속 줄이고 있다. 미국 주식이 너무 올라 현금 확보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버핏은 기업에 집중하는 투자자다.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사업”이라며 애플을 주식이 아닌 사업으로 강조해온 버핏의 포지션 변화는 의미 있다. 트럼프의 관세는 제조업체들이 의존하는 글로벌 공급 체인을 흔들고 있다. 애플의 생산기지는 중국이다.
자유무역이 흔들리고 있다. 곤경에 빠진 기업들은 누군가 손을 잡아 수렁에서 꺼내주기를 바라지만, 적절히 대응하는 이는 많지 않다. 오히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몰두하고, 이미 시작된 변화에는 더디게 행동한다. 트럼프의 시대를 피할 수 없다면 되도록 빨리 적응해야 한다. 미국은 다시 철강공장을 돌리고 자동차를 부흥시키고 전자부품을 만들고자 한다. 미국 내에서 생산하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남은 선택은 하나다. 트럼프는 자서전 <거래의 기술>에서 모든 것은 거래를 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트럼프의 통 큰 거래에 이제 한국의 기업들이 답할 차례이다.
윤지호 LS증권 리테일사업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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