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시대에서 백마 탄 초인을 꿈꿔 온 제3세계 작가들

안시욱 2024. 11. 1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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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 작가 전시
토미야스 라당, 식민지 아픔을
'올드 소울-뉴 소울' 주제로 표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어"
니키 노주미, 이란혁명 그려내
말과 꽃 등으로 조국 상황 표현
"어떠한 장애도 없어지길 바라"
토미야스 라당의 ‘도미노’(2024) 등 나뭇조각 연작. 에스더쉬퍼 제공


제3세계로 불리는 나라들이 있었다. 그중 상당수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곳에서 전쟁과 혁명, 포스트 식민주의로 신음했다. 제3세계 시민의 아픔을 들려주는 전시가 열렸다.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과들루프 출신 토미야스 라당(31), 조국 이란에서 쫓겨나 미국에 정착한 작가 니키 노주미(82)가 그 주인공이다.

 ○춤으로 승화한 식민지의 아픔

서울 이태원동 에스더쉬퍼에서는 라당의 첫 번째 아시아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은 ‘올드 소울-뉴 소울(오래된 영혼-새로운 영혼)’. 여러 세대에 걸친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뜻을 담았다.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려면 대서양 카리브해 서인도제도의 섬나라 과들루프 역사를 알고 가는 편이 좋다. 영국과 스웨덴 등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지금은 프랑스의 해외 영토로 표기된다. 라당의 고향으로 두 개의 큰 섬(바스테르와 그랑테르)이 주요 영토다.

그의 작품에는 식민지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들루프의 상처가 담겨 있다. 전시장 1층에 배치된 두 점의 타악기 나뭇조각이 이를 보여준다. 할아버지부터 3대째 목수로 활동하고 있다는 작가의 가족 내력을 표현한 작품이다. 카리브해의 전통춤은 라당 작품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다. 2~3층에 전시된 5점의 회화도 춤추는 인물을 묘사한다. 그는 “임산부의 태동부터 시작하는 몸짓은 인간이 처음 경험하는 언어”라며 “춤을 통해 과거에서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라당은 ‘라이벌’이라는 단편영화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바닷가에서 마주친 사내 두 명이 몸싸움을 벌이는 내용이다. 싸움은 두 명 모두가 ‘어떤 거대한 힘’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화해하고 끝이 난다. ‘라이벌’은 이번 전시회에 나온 회화 ‘전복, 전율, 해방’(2024)과도 맥을 같이하는데 이 그림에도 하얀 가면을 벗은 두 사람이 등장한다.

전시된 모든 작품의 공통점은 하나. 아슬아슬해 보이는 동작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기 위해선 우리 마음에 상처를 남긴 폭력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14일까지다.

 ○꽃 대신 총을 몰고 온 혁명의 상처

니키 노주미의 ‘푸른 말’(1981). 바라캇컨템포러리 제공

서울 소격동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선 노주미의 개인전 ‘누군가 꽃을 들고 온다’가 열렸다. 1942년 이란에서 태어난 작가는 40여 년간 권력과 폭력의 관계를 빗댄 대형 회화를 그렸다. 이란혁명 등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미국으로 이민 간 뒤 마이애미에서 제작한 모노타이프 60여 점을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모노타이프는 물감을 떨어뜨린 금속 또는 석판 위에 종이를 덮어 인쇄하는 표현 기법이다. 물감이 금세 마르며 즉흥적이거나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오는 게 묘미다. 작가는 미국 유학 시절인 1976년 모노타이프를 처음 접했다. 새로운 기법을 물색하던 젊은 시절의 호기심을 충족하고, 조국의 정치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등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전시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슬람원리주의의 공화국을 세운 1979년 이란혁명이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누군가 꽃을 들고 온다’(1976)는 혁명의 기운이 임박한 가운데 탄생한 작가의 첫 번째 모노타이프다. 늦은 밤 거리에서 붉은 장미를 지탱하고 있는 민초를 형상화했다. 붉은 장미는 이란혁명을 상징하는 꽃이다.

희망찬 제목과 달리 작품이 풍기는 인상은 위태롭다. 실제로 혁명의 결실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혁명 당시만 하더라도 이란은 민주화를 앞둔 희망에 가득 찼다. 하지만 혁명 이후 찾아온 건 꽃이 아니라 칼이었다”고 말했다.

노주미는 전시장 지하 1층에 걸린 ‘푸른 말’(1981) 등 대작을 미국에서 그렸다. 칠흑처럼 어두운 배경에 그려진 건 푸른 빛의 말 한 마리. 용맹, 권위 등 고대 페르시아부터 이란의 정체성을 상징한 동물이다.

암담한 현실에서도 달리는 말을 그리며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평화, 어떤 장애물 없이 일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자유”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 12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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