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프이스트-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잘 쓰려고 하지 마라

2024. 11. 1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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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군 복무는 하루를 더 한 셈이다. 제대 신고하고 영외 장교 숙소에서 이튿날 사단장 부대 방문 브리핑 차트 만드는 일을 밤새 거들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 나오는 부대 차를 타고 집에는 다음날 왔다. 흐뭇해하는 아버지께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집에 데려다주니 고맙죠”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인정받은 네 군대 생활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고마운 마음이 사그라지기 전에 편지를 써서 표현하라”라고 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애썼지만, 아버지가 찾은 아침까지 끝내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잘 쓰려고 하지 마라”라면서 “부대장님 앞으로 지금 네 마음을 ‘고맙습니다’로 시작해서 그대로 글로 옮기면 된다”고 일깨워줬다. 아버지는 읽던 신문 칼럼을 내주며 참고하라고도 했다.

그날 읽은 칼럼이다. 프랑스를 방문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몽마르트르 언덕을 찾았다. 때마침 한 화가가 그림을 시작 못 하고 하얀 캔버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째 그리지 못하고 있다고 수행원이 귀띔하자 엘리너는 화가의 붓을 달라고 해 하얀 캔버스에 점을 하나 찍었다. 그걸 본 화가는 깜짝 놀라 붓을 빼앗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칼럼은 ‘아마추어는 걸작을 만들려다 기회를 놓치지만, 프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시작해 걸작을 골라낸다’라고 마무리했다.

말씀대로 편지를 써 부치고 나자 아버지가 불러 “잘 하려다 시작도 못 하는 것보다 잘못되더라도 도전해본 게 더 낫다”고 했다. 그날 아버지는 ‘잘했다’를 이렇게 설명했다. ‘많다’라는 표현으로 ‘억(億)’이라는 수(數)를 쓴다. ‘억수(億數)’란 말은 거기서 나왔다. 억보다 훨씬 더 큰 수가 많다. 억의 만(萬) 배는 조(兆), 조의 만 배는 경(京)이다. 경의 만 배가 해(垓), 해의 만 배가 자(秭), 자의 만 배가 양(壤)이다. 숫자는 계속됐다. 양의 만 배가 구(溝), 구의 만 배는 간(澗), 간의 만 배는 정(正), 정의 만 배는 재(載), 재의 만 배는 극(極)이다.

불가(佛家)에서는 극의 억 배를 항하사(恒河沙), 항하사의 억 배를 아승기(阿僧祈), 아승기의 억 배를 나유타(那由他), 나유타의 억 배가 불가사의(不可思議)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치기 어려운 신비의 수다. 이 불가사의의 억 배쯤 되는 수가 무량수(無量數)다. 아버지는 “‘잘’은 어느 정도 칭찬인지 아느냐?”며 바로 “억은 0이 8개지만, 잘은 40개다. 신의 세계에서나 쓰는 숫자다”라고 했다. ‘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잘’은 일이 빈틈없이 이루어진 모양새를 나타내며 ‘잘하다’란 의미로 굳었다. “‘잘하다’라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잘하려고만 하면 끝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며 시작이 어려운 이유를 설명해줬다.

그 밖에 아버지는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데서 오는 부담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계획이 명확하지 않은 데서 오는 어려움, 과도한 책임감, 그 일에 대한 동기 부족, 잘못 길든 습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을 시작도 못 한다”고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보충했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 하겠다는 건 정성의 발로이고 잘하겠다는 건 욕심에서 나온다. 최선을 다했다면 잘한 것보다 낫다”라고 했다. 이어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는 게 옳다. 읽는 사람도 부담 가지지 않을 것이다. 군대에서 나쁜 일이 있던 걸 고발한다면 그 말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한 몸을 건사해준 고마운 인사라면 그 말을 먼저 하는 게 낫다. 글로 옮기기도 쉬울 것이다”라고 이미 편지를 보냈는데도 설명을 덧붙였다.

그날도 말씀 끝에 일러준 고사성어가 ‘선시어외(先始於隗)’다. ‘먼저 외부터 시작하라’는 말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말한 사람부터 시작하라는 뜻이다. 《전국책(戰國策)》의 〈연책 소왕(燕策 昭王)〉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전국시대 연(燕)나라 소왕이 재상 곽외(郭隗)를 불러 제(齊)나라에 빼앗긴 실지 회복 방책을 물었다. 곽외는 “어느 왕이 천금을 걸고 3년 동안이나 천리마를 구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하급 관리가 구해 오겠다고 청해 석 달 뒤에 천리마가 있는 곳으로 갔으나 이미 죽었습니다. 그는 죽은 말의 뼈를 오백 금을 주고 사 왔고[買死馬骨], 왕이 진노했습니다. 그는 죽은 말의 뼈를 오백 금이나 주고 샀으니 천리마를 가진 자들이 훨씬 높은 값을 받으려고 몰려들 것이라 했는데 일 년 뒤 세 필이나 모였답니다. 인재를 얻으시려면 우선 저부터[先始於隗] 기용하십시오”라고 간언했다.

소왕은 황금대(黃金臺)라는 궁전을 지어 그를 머물게 하자 소문이 나서 천하의 인재가 모여들었다. 명장 악의(樂毅), 음양오행설의 제창자 추연(鄒衍), 대정치가 극신(劇辛) 같은 인물도 그때 왔다. 소왕은 이들의 헌신적인 보필로 제나라를 공격해 원수를 갚았다.

글을 읽기 시작하는 손주를 보니 불현듯 떠오른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나이 들어 우연한 기회에 나는 비교적 쉽게 터득했지만, 같은 어려움을 겪어야 할 손주들에게도 꼭 물려주고 싶은 아버지의 고사성어다. 가르쳐야 할 성품은 어떤 것일까? 어려워하거나 두려워 시작하지 못할 때 가장 요긴한 성품은 아무래도 저돌성(豬突性)일 것이다. 사전에서 말하는 ‘앞뒤를 따져 보지 않고’란 표현만은 빼고 ‘마구 덤비는 성질’이 필요하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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