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소소리’ 이호재·이원희 “힘들지? 그래도 살아 있으면 언젠가 좋은 일 생겨” [인터뷰]

고승희 2024. 11. 1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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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웅 연출가의 연극 ‘퉁소소리’
아름다운 우리말로 빚은 생의 의지
“400년 전 혹은 지금의 내 이야기”
‘퉁소소리’ 배우 이호재 [세종문화회관 제공]

“배우 이호재입니다. 늙은 최척 역을 맡아 이 자리에 섰습니다.”

막이 오르고 무대 위 조명이 밝아오면, 배우 이호재(83)가 책 한 권을 들고 걸어나온다. 1963년 연극 ‘생쥐와 인간’으로 데뷔한 무대 인생 62년차의 노배우. 한 줄 한 줄 발화한 그의 대사는 웅변하지 않아도 묵직한 힘이 담겼다.

이호재는 연극 ‘퉁소소리’의 ‘안내자’이자 ‘서술자’다. 그는 오늘의 관객과 과거의 이야기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지금 이곳에 400년 전을 살다간 인간 최척을 관객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무대에서 60여 년의 여정을 보냈지만, 이호재가 내레이터 역할을 하는 것은 이번이 겨우 두 번째다. 피터 쉐퍼의 연극 ‘요나답’이 첫 번째였다. 최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그는 “이런 연극이 흔치 않아 경험이 많지 않다. 내레이터이면서 극중 인물도 오가는 데다 우리말의 맛을 살리려다 보니 쉽지 않다”며 웃었다.

‘퉁소소리’는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30년 전란 동안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소설 ‘최척전’(1621년)을 원작으로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이 15년 간 무대화를 준비한 ‘역작’이다.

고선웅 연출가와는 이번이 첫 만남. 그의 작업 방식은 보통의 연출가와는 확연히 다른 지점이 있다. 이원희는 첫 연습을 떠올리며 “대본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생략된 채 본연습 첫날부터 바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며 “좋은 쪽으로 충격적이었다”고 돌아봤다.

고선웅이 그리는 캐릭터의 생생함은 연출가만의 독특한 연습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그의 작품에선 첫 리딩 이후 약 한 달간 각자의 시간을 충분히 보낸 뒤, 1주일 간 다시 리딩 시간을 거쳐 본연습에 돌입한다는 것이 배우들의 설명이다.

서울시극단 ‘퉁소소리’ [세종문화회관 제공]

“배우마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충분히 준비하고 고민한 뒤 정돈된 상태로 연습에 임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연출님께선 그런 틈을 주지 않는 것이 독특하고 흥미로웠어요. 그 부분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도리어 본질에 충실하게 돼 서툴고 투박하고 거칠어도 희곡에서 읽히는 충동들을 거르지 않고 본능적으로 쫓아가게 되더라고요.” (이원희)

연극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담기고, 조연 배우들은 1인 다역이 필수다. 이원희만 해도 하객4, 피난민8, 베트남 상인4, 진위경 등 총 7개 역할을 맡았다. 그는 “각각의 인물이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며 “단지 개인적 인물이 아닌 시대를 대표하는 인간 군상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연습 과정에서 고선웅 연출가는 정확한 디렉션을 주는 것은 물론 배우들의 동선과 손짓, 발짓, 웃자락의 위치까지 확인하는 ‘디테일의 강자’다. 이호재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고 웃으며 “(고선웅 단장은) 대단히 현명한 사람이고, 배우를 잘 다룬다”고 했다.

이 많은 인물들은 대사 한 마디 없이도,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팔딱팔딱 살아 숨 쉰다. 이호재는 “연출가가 작품을 썼기에 모든 역할을 교묘하게 나누고, 어디에도 겹치지 않도록 배치했다”며 “많은 역을 소화하기 위해선 배우의 역할이 중요한데 (이원희는) 그것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호재는 노(老) 최척이 돼 젊은 날의 자신을 바라보며 삶을 돌아본다. 때론 흐뭇하고, 때론 혀를 끌끌 차며 장난스러운 ‘자아 비판’도 한다. 극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때도 있다. 의병 합류를 제안받을 때였다. 늙은 최척은 “젊은 네가 가라”며 옆에 있던 ‘젊은 최척’ 박영민을 떠민다. 암전을 최소화한 연극에서 그는 말맛이 살아난 문장들을 읊조리며 관객과 연극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준다.

‘퉁소소리’ 배우 이원희 이호재 [세종문화회관 제공]

“‘망망대해 섬들이 떠있다가 돌아보면 홀연 사라지니…’ 라는 대사가 있어요. 이건 대본이 아니라 한 편의 시이자 글이에요. 많은 작가들이 있지만 우리말을 이렇게 아름답게 구현하는 작가는 드물어요. 아름다운 글을 아름답게 표현해야 하니 배우로선 힘들죠.” (이호재)

대선배의 이야기에 이원희는 감탄의 연속이다. 그는 “선생님은 무대에 서 계시는 것만으로 완전한 언어처럼 느껴진다”며 “(선생님께선) 무대 위의 음악과 배우들의 대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그것을 풀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살아가면서 선생님과 같은 호흡으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싶어, 제겐 너무나 큰 공부가 되는 시간”이라며 웃었다. 거장 배우(이호재)는 후배의 존경을 유쾌하게 받는다. 그는 “난 이번에 연극을 처음 하는 사람”이라며 “어젯밤에 전화해 나 좀 좋게 얘기해달라고 부탁했다”며 맞받아쳤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불린다. 무대 아래에서 정해진 약속으로 완벽한 합을 이뤄도 막이 열리면 그곳은 온전히 배우가 끌고 가기 때문이다. 이호재는 하지만 “배우는 언제나 선택받는 사람”이고, “연출의 뜻에 따라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서로 의견이 다를 땐 ‘절충’하지만, 그는 되도록 “늘 전체를 보는 연출의 말을 따른다”고 말한다. 배우는 자신의 배역에만 쏟아져 들어가 몰입하기에 연출가가 바라보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엔 무대를 진두지휘하는 연출가를 향한 존중이 묻어난다.

‘퉁소소리’ 배우 이원희 이호재 [세종문화회관 제공]

무대의 배우들이 특별한 것은 매일 같은 대본과 같은 공간에서 연기해도 매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는 “연극 배우는 일회성 배우”라며 “하루에 두 번 공연하면 낮 공연과 밤 공연이 다르다. 무대 위의 배우는 상대 배우에 따라,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관객의 반응에 따라 연기가 달라지기에 기계로 찍은듯 똑같은 연기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직 그 자리를 찾아온 ‘관객’들을 위한 순간인 만큼 작품을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는다.

“연극배우는 죽으면 끝이에요. 드라마나 영화처럼 영상으로 남지도 않아요. 아무런 남김이 없죠. 내가 남기고 싶다고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오직 관객의 가슴에만 작품으로 남기는 거죠.” (이호재)

관객들은 이같은 ‘시간 공연의 가치’를 안다. 이호재가 등장하면 객석에선 무대가 시작됐음에도 박수가 나온다. 연극 무대에선 이례적인 일이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엔 30년을 응축한 지난한 피란사가 담담하게 녹아난다. 그 안에서도 놓지 않는 생을 향한 의지, 결코 으스러지지 않는 민초들의 삶이 묻어난다.

‘퉁소소리’ 배우 이호재 [세종문화회관 제공]

이호재는 ‘퉁소소리’는 “400년 전의 이야기이나 이 시대와 통하는 점이 많다”며 “정신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충격이 오는 것도 침탈이며,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이로 인한 이산(離散)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비극”이라고 했다. 이원희에게 이 작품은 짙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는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인데, 이 작품이 가진 힘의 울림은 관계 속에 있다”며 “가족, 사랑, 우정 등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존재라는 인식, 우리는 서로 기대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메시지가 따뜻한 감동을 안게 한다”고 했다.

연극은 그 시대를 통해 생을 향한 강렬한 의지를 들여다 보고, 시대를 초월해 지금의 관객을 어루만진다. 시대에 떠밀려 저마다의 폐허를 안고 사는 2024년의 우리에게 ‘괜찮다’, ‘살아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말한다. 늙은 최척의 대사는 한 권의 책에 담긴 마지막 문장 같기도, 오랜 시간을 굽어본 현인의 회고같기도 하다. 이호재는 이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사는게 얼마나 어렵고 힘들고, 죽을 것 같냐”며 그래도 괜찮으니 ‘살아가보자’는 또 하나의 염원이다.

“죽을 것 같아도 목숨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염원이 노부부의 두 눈에 가득하셨습니다. 바람이 불고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계절이 오면 어디선가 퉁소소리가 나는 듯 하고 아름다운 시구절도 들리는 듯 합니다.” (‘퉁소소리’ 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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