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정치’가 바라봐야 하는 곳

한겨레21 2024. 11. 1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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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2024년 미국 대선 부통령 후보들이 상징하는 ‘약속’의 차이…‘사적 욕망’은 각자의 몫, ‘정치’는 공동체 속 시민의 긍지·명예 지켜야
2024년 10월1일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부통령 후보 제이디 밴스와 민주당 부통령 후보 팀 월즈가 시비에스(CBS)가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두 부통령 후보의 삶의 이력과 내놓는 정치적 약속의 차이가 극명히 대비됐다. REUTERS

“아버지는 살면서 언제가 제일 기쁘셨어요?”

고령의 아버지는 인지 역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보청기를 하더라도 잘 들리지 않아 말하는 일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문가인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가장 좋은 게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말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 했다. 여러 말을 붙여도 늘 단답형으로만 말씀하시더니 저 질문에는 오랜만에 아버지의 눈이 반짝이며 당신의 기억을 길게 이야기하셨다.

아버지는 “취직했을 때” 제일 기뻤다

대답은 의외였다. 자식을 낳거나 자식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나 혹은 단칸 셋방에서 탈출해 ‘내 집 마련’에 성공했을 때가 아니었다. “제일 기뻤을 때는 탄광에 취직했을 때였지. 처음에 지원해서 떨어졌을 때 죽고 싶었다. 신체검사에서 떨어졌거든. 그래서 탄광 앞에 드러누워서 내가 왜 떨어졌냐고 항의도 했어. 아는 사람 통해서 겨우 다시 재검해서 다닐 수 있게 됐지.”

아버지는 신체검사에서 자기를 떨어뜨린 의사가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분노를 표현하셨다. 그만큼 아버지에겐 탄광에 취직하느냐 아니냐는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아버지는 그때가 왜 가장 기뻤냐는 말에 뭘 그런 것을 물어보냐는 듯 “이 사람아, 취직해야 사람 노릇을 할 것 아닌가. 이제 사람 구실 하며 열심히 살 수 있게 됐는데 어떻게 안 기쁠 수가 있는가?”라고 대답하셨다. 늘 무표정해 보이던 아버지의 얼굴에 기쁨이 완연했다.

그다음으로 언제가 제일 기뻤냐는 말에 아버지는 현대건설 노동자로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 갔을 때라고 했다. 덥고 위험했지만 목돈을 쥘 수 있었다. 생활은 어땠냐는 말에 아버지는 “거기 간 사람 중에 나처럼 애초부터 트럭 몰던 사람들은 잘 지냈지. 문제는 버스 몰다가 온 ×들이었어. 그들은 트럭을 몰아본 적이 없다보니 되게 위험하게 운전했거든. 돈 욕심만 냈으니까. 자기들만 위험한 게 아니라 남들도 위험해지잖아.”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지의 생각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경상도 출신인 아버지는 자식들이 학생운동을 했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보수 정당을 지지했다. 박정희와 정주영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 ‘먹고살게 해준 절대적 은인’이라 생각한다고 알고 있었다.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열심히 살 수 있게 했다’는 것이었다.

‘먹고사니즘’이 아니라 ‘열심히 살고 싶은’ 욕망

“먹고 살게 되었다”는 것과 “열심히 살 수 있게 했다”는 주체에 대한 완전히 다른 욕망의 진술이다. 전자에는 주체의 욕망이 없다.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 먹고 마시는 물질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동물’(철학적 의미에서)로 여겨진다. 따라서 ‘먹고사니즘’이 보수 정당을 지지하고 박정희와 정주영을 절대시하는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기이자 선택의 이유다. 흔히 아버지 같은 사람의 욕망과 주체성을 바라보는 상투적 시선이다.

반면 “열심히 살게 했다”는 주체의 욕망이다. 이 욕망의 핵심에는 능동성이 있다. 주어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하며 살겠다는 자유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는 말이다. 그저 돈을 벌고 쓰고 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동기를 가지고 목적을 수행하는 행동이 있는 능동적 삶을 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욕망을 ‘먹고사니즘’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아버지라는 존재를 동물 수준으로 폄훼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눈을 반짝이는 아버지의 말에는 단순히 먹고살게 됐다는 만족을 넘어 당신 삶에 대한 세 가지 차원의 가치 부여와 기쁨이 있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상호작용 의례’에서 말한 개념을 빌려온다면 첫째는 ‘열심히 사는 것’을 스스로에 대한 최우선적 임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긍지 높은 삶이고, 둘째는 더 큰 사회 단위를 위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중심에 두는 명예이며, 셋째로 감정이나 몸가짐 같은 태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품위 있는 삶이다.

아버지가 말한 “열심히 살게 됐다”는 말에서 느끼는 자부심은 무엇보다 자신이 남편/아버지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었다는 기쁨이다. 아버지는 임무를 다한 당신의 삶이 긍지 있는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중동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덤프트럭과 레미콘 등 전문가로서 중장비를 운전하며 나라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그 의무를 다했다는 점에서 명예롭게 생각하셨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의무를 다하고 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무례하게 대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품위를 잃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명예와 긍지, 그리고 품위는 ‘먹고사니즘’으로 포괄되고 수렴되는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먹고사니즘’으로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그분들의 삶에 대한 지독한 폄훼라고 할 것이다.

아버지의 말을 새롭게 읽게 되면서 사람들의 욕망을 다시 보게 됐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 싶어 한다. 워라밸이니 소확행이니 하는 트렌디한 말들은 그 자체로 동시대를 설명하는 주요한 키워드겠지만 그럼에도 보통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은 열심히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의 욕망을 경제적으로만 보는 것은 그들의 삶에 대한 모욕이자 정치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치명적 오판이 될 것이다. 어떤 문제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정치가 해야 하는 일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2014년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가족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산업화 세대’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그린 작품. 경상도 기반 ‘산업화 세대’ 아버지들이 보편적으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의 원인에 대해 ‘먹고사니즘’이 아니라 ‘열심히 살 수 있게 했다’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정치의 역할을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 제이케이필름 제공

제이디 밴스는 공동체를 ‘탈출’

이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인물이 얼마 전 끝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나온 두 인물이다. 두 후보 모두 미국 선거에서 가장 뜨거운 지역 중 하나인 러스트벨트의 흙수저 출신이다. 둘 다 열심히 살고 싶어 했으며 실제로 열심히 살았지만 그들에게 그 ‘열심히 한 삶’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한 판단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그 지역 같은 처지의 유권자를 향해 “열심히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정치적 약속 역시 완전히 다르다.

부통령에 당선된 제이디(J.D.) 밴스에게 그가 ‘열심히 한 삶’을 사는 데 가장 방해가 된 것은 그가 속한 쇠락한 하층 노동계급 공동체 자체다. 산업이 몰락하고 경제가 파탄 나면서 하층 노동계급의 공동체는 알코올중독과 마약, 그리고 범죄로 서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절망적 늪 같은 곳이다. 공동체 자체가 가망이 없다. 여기에 돈 몇 푼 쥐여주고 복지라는 이름으로 ‘관리’하는 것은 절망에서 탈출하게 하는 장치가 아니다. 열심히 살고자 한다면 이 공동체를 탈출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그는 매우 강하고 긍지 높았던 할머니라는 존재와 극히 제한적인 몇몇의 도움으로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탈출한다. 따라서 그에게 그의 성공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성공일 뿐이다. 공동체에 돌아갈 감사는 없다.

반면 민주당 후보로 나왔다가 떨어진 팀 월즈의 경험은 완전히 반대다. 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언제나 그의 주변에는 이웃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웃과 함께 성장했고 이웃과 함께 열심히 살았다. 그가 열심히 살 수 있도록 격려하고 받아준 것도 이웃이다. 그렇기에 그는 곁이 있는 삶, 그 곁들의 서클로서의 공동체를 강조한다. 그가 선거 내내 유세에서 미식축구 코치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밴스와 정반대로 그에게 공동체는 사람이 절망에서 벗어나 ‘열심히 한 삶’을 살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정치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이 공동체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를 통해 사람은 명예와 긍지, 그리고 품위를 추구하는 ‘활동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미국 대통령 선거는 부통령이 극히 제한적인 기여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 대선에서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정치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두 노선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이 두 부통령 후보였던 것 같다. 선거에 미친 영향과는 별개로 말이다. 이 둘의 이야기 중 어떤 쪽이 자신들의 ‘경험적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지를 보는 것이 동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을 가늠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 싶어 한다. 정치가 단단히 자리해야 하는 욕망은 시류에 휩쓸려 다니는 다른 어떤 욕망도 아니고 이 욕망이다. 정치가 바라봐야 하는 사람 역시 이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다른 욕망의 사람들이 아니다. 이 외의 다른 욕망이란 개인이 자기의 사적인 힘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 정치 공동체가 근간으로 삼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정치는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바라봐야 하고 이들이 긍지를 가지고, 명예롭게,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기본을 만들어줘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자리’로서의 일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아버지가 탄광에 취업하는 것을 통해 가질 수 있었던 사회적 ‘자리’로서의 일이었다. 돈을 번다는 ‘일’자리의 의미만큼이나 일‘자리’의 의미가 중요했다. 그 ‘자리’는 지위에 따라 완수할 임무가 있는 자리였고,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자리였으며, 임무와 의무를 수행하는 개인적 태도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자리였다. 이 자리를 가질 수 있는 무대와 환경을 갖추는 것, 그것이 그 공동체에 태어난 시민이 긍지를 가지고 명예를 추구하고 품격 있게 살아가게 하는 정치가 아니겠는가.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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