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 줄여야 납품되는데···‘배출량 계산’조차 버거운 중소기업[사장님의 기후①]

윤지원·김지혜·김경민 기자 2024. 11. 1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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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상장사가 대상인 ‘기후공시’ 법제화
왜 중소기업을 위해 필요한가
친환경 염색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중소기업 ‘그린웨어’ 공장 내부에 21일 원단이 쌓여있다. 2024.10.21. 정효진 기자
지구 온도 상승을 1.5℃ 이내로 억제하기 위해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2050 탄소중립 목표 실현까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25년이다. 국내 총 탄소배출량의 절반 가량이 산업 부문에서 나오고, 이 가운데 30%가 중소기업에서 배출된다. 대기업 못지 않게 중소기업의 탄소 배출 저감 노력이 절실한 이유다. 하지만 작은 기업들은 탄소 배출량을 줄이긴커녕 배출량을 계산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에 있다. 고객사의 요구가 있기 전까진 의지도 약하다. 이같이 무방비 상태로 있다간 세계 무대에서 도태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각국에서 교역 국가를 대상으로 저탄소 기후대응을 압박하는 규제 흐름이 가속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소기업의 현주소와 해외 동향을 총 3회에 걸쳐 짚어본다.

기회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이탈리아의 유명 원단 기업 A사가 2022년 거래를 제안했다.천연 염색 스타트업인 그린웨어는 매출이 투자 규모를 따라가지 못하던 차였다. 허현범 대표는 A사의 거래 제안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반겼다. 하지만 동아줄엔 쉽게 붙들기 어려운 조건이 붙어 있었다.

“계약 얘기가 오간 지 얼마 안 돼 A사가 묻더군요. 우리 사업장에서 매달 배출하는 탄소량이 얼마나 되냐고요.” 그린웨어는 탄소배출이 일반 화학염색 대비 최대 70% 적은 명실상부 저탄소 친환경 기업이다. 그런데도 국내 중소기업 대다수가 그렇듯 탄소배출량을 산출하는 방법에 대해선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었다.

많은 유럽 기업처럼 A기업도 일찍이 탄소중립을 선언했고, 탄소배출량은 곧 ‘돈’이었다. 배출량이 많아지면 그만큼 써야 할 탄소 저감 비용도 커진다. A사는 기존의 화학 염색 공정을 그린웨어의 천연 염색으로 대체한다면 탄소배출량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 객관적인 수치 자료로 확인하고 싶어했다.

허 대표는 허겁지겁 공부를 시작했다. 탄소배출량의 계산과 보고는 ‘스코프1·2·3’이라는 국제 분류 기준에 따른다. 사업장에서 직접 사용한 화석연료가 얼마나 되는지(스코프1), 전기는 얼마나 썼는지(스코프2), 외주 공장이나 배송·판매 과정에서 사용되는 가스와 전기는 얼마나 많은지(스코프3)에 대한 데이터를 싹싹 긁어모아야 했다.

“데이터 모으기도 쉽지 않고, 그걸 탄소배출량으로 환산하는 작업은 더 어려웠어요. 가스도 LPG, LNG 중 뭘 썼느냐에 따라 1메가줄(MJ)당 탄소배출량이 다릅니다. 염료도 화학이냐 천연이냐에 따라 생산·가공 과정에서의 배출량이 다른데 모든 염료의 배출량이 일일이 고시된 게 아니라서 계산에 애를 먹었죠.”

허 대표가 배출량 산정을 끝낼 수 있었던 건 다행히 도움의 손길을 만난 덕이었다. 국제 협력기관인 아셈중소기업친환경혁신센터(ASEIC)의 지원 사업에 선정돼 컨설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허 대표는 저탄소 기업이 일하는 국내 시장 환경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이다. “사실 기회만 되면 해외로 이전하고 싶습니다. 유럽에선 친환경 사업에 대한 관심도 높고, 기후 공시에 따라 검증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을테니까요. 국내에서 이미 사양화된 섬유 산업으로 저탄소를 한다고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친환경 염색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중소기업 ‘그린웨어’ 허현범 대표가 21일 경기 양주시 회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2024.10.21. 정효진 기자
EU 공급망실사 적용받는 중견기업도 고군분투
n차 중소 협력사들, 고객사 요구에 잠적하기도

허 대표의 고군분투기는 앞으로 국내 중소기업들이 순차적으로 겪게 될 문제다. 유럽연합(EU)에서 지난 7월 ‘공급망 실사지침(CSDDD)’이 발효됐기 때문이다. CSDDD는 비인권적 기업, 고탄소 기업을 가려내기 위해 EU에서 도입한 일종의 규제 지침이다. EU 국가의 기업과 거래하는 국내 기업들도 당연히 적용을 받는다. 고객사의 공시 의무에 따라 국내 기업들은 자신의 n차 협력사 전체를 대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 유해화학물질 및 폐기물 관리체계 구축 여부 등을 꼼꼼하게 파악해 보고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국내 중견기업 B도 CSDDD 타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유럽 의료기기 제조사 등에 스테인리스 와이어를 납품하는 이 회사는 고객사 요구를 받고 국내 협력사를 조사하기 위해 팀까지 만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회피하려는 기업이 많아서 찾아가 참여해달라고 어르고 달래고… 1시간 만에 끝내겠다고 사정하는데도 연락을 안 받기도 해요. 40개 협력사 중 올해 5개사 관리가 목표였는데 지금까지 2~3개 마무리했어요.” 관계자의 말이다.

협력사들이 고객사인 B사 요구에 소극적으로 나오는 건 그 어떤 것도 준비가 되지 않아서다. 개별 협력사는 탄소배출 등 여러 문제에서 리스크를 식별하고, 실사 방법 및 결과 그리고 개선 활동을 입증하는 자료를 함께 내야 하는데 서류화 작업이 제대로 갖춰진 중소기업은 거의 없다.

유수 대기업의 협력사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삼성전자는 2022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데이터에서 367개를 현장실사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삼성전자의 1차 협력사로 2·3차 등 n차 회사에 대한 정보는 아직 불분명하다.

고객사 요구가 없는 중소기업은 마냥 무방비 상태일 가능성도 높다. 2021년 중소기업중앙회가 352개 제조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 응답 기업 중 48.6%가 탄소중립을 인지했지만 대응계획이 있는 기업은 13.9%에 불과했다.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본부 밖에 유럽연합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해외 규제 드라이브 속 정부지원 대상 협소
무방비로 버티다 공급망 퇴출 위험도

문제는 탄소배출 측정과 감축에 소극적이었다가는 순식간에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유사 사례도 있다. 지난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조사에 따르면 모터 부품을 제조하는 한 국내 부품사가 스웨덴의 자동차기업 볼보로부터 2025년까지 모든 제품을 재생에너지로만 생산해 납품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충족하지 못해 공급망에서 제외됐다.

현재 정부가 시행하는 중소·중견기업 지원책만으론 전 세계적인 탄소배출 규제 흐름에 제대로 대비할 수 없다. CSDDD가 규정하는 ‘공급망’은 회사의 사업 활동, 제품 또는 서비스와 관련된 상업적 계약을 맺은 직접적 비즈니스 파트너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활동을 수행하는 간접적 파트너까지 모두 포함한다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다. CSDDD 실사대상으로 편입될 중소기업만 해도 수천개에 달해, 정부 지원으로 완벽히 커버하긴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는 “중소기업의 경우 납품한 고객사가 어디에 뭘 파는지 정확히 모를 수 있다”며 “잠재적으로 자신이 실사 대상에 해당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너무 늦다”고 말했다.

지원사업 규모도 협소하다. 배출량 측정과 관련해 중소기업을 돕는 지원 사업으로는 혁신바우처, CBAM(탄소국경조정제도) 인프라 구축 사업 등이 있는데 두 사업 모두 올해 예산이 각각 558억원, 24억원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기업간 경쟁도 붙는다.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지원사업도 알아야 신청이 가능하다보니, 지원받는 회사만 계속 받는 구조”라고 말했다.

늦어지는 기후공시 의무화 스케줄
“기후공시, 중소기업 경쟁력에 영향”

전문가들은 국내 중소기업이 글로벌 차원의 기후대응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일정규모 이상 상장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후공시 법제화’라는 강력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후공시는 온실가스 배출량과 감축 계획 등을 공시하도록 하는 장치로, 당초 2025년부터 일정규모 상장사에 의무화하기로 했다가 재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지난해 10월 무기한 연기됐다.

최용환 NH아문디자산운용 ESG리서치팀장은 “기후공시 법제화 논의가 상장 대기업의 부담을 이유로 연기됐는데, 궁극적으론 국내 중소·중견기업이 무역·통상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만드는 유도책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일부 의지가 있는 중소·중견기업들만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만, 더 많은 기업의 배출량 측정을 유도하기 위해선 공시 대상인 대기업, 즉 고객사의 요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수석연구원은 기후공시 제도가 도입되면 향후 CSDDD 요구를 받게 될 중소기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현재는 EU 고객사들이 각사별로 요구하는 배출량 측정 등의 양식이 달라 중소·중견기업 입장에선 일일이 맞춰야 하는 불편이 있다”면서 “국내 공시제도가 생겨 시스템이 갖춰지면 그 양식을 가지고 고객사들과 맞출 수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의 배출량 관리 측면에서도 기후공시가 필요하다. 현재 중소기업 전체의 배출량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가 전체 배출량의 15%, 산업 부문 배출량의 3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현영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은 “중소기업의 배출량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시급하다”며 “지금까지 관리 영역에서 벗어나 탈탄소 유인이 없던 중소·중견기업이 대기업의 스코프3 등 기후공시로 배출량 산정에 참여한다면 정부지원과 중소기업의 감축효과가 연계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후공시 담당 부처인 금융위원회는 지난 9월 관련 간담회 개최 이후 추가 진행 상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3일 기후공시 의무화를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법안 시행일을 공포 후 6개월로 못 박았다. 정부와 여당이 얼마나 협조할지는 미지수다. EU는 2025년, 영국·호주·홍콩은 2026년, 일본은 2027년부터 기후 등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를 시작할 예정이다.

윤지원 기자 yjw@kyunghyang.com,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김경민 기자 kim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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