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에 굶주린 독수리의 ‘거품경제’ 사냥

한겨레21 2024. 11. 19.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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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읽는 경제학]일본 버블기 금융인·기업인·관료의 맨얼굴, 마야마 진의 경제소설 ‘하게타카’
일본 도쿄 경제 중심지 마루노우치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마야마 진의 소설 ‘하게타카’(ハゲタカ)의 주인공 시바노 다케오는 1997년 미쓰바은행의 자산유동화개발실장에 임명됩니다. 일본 경제의 버블이 터져 어수선한 시기에 부실채권(NPL)을 통째로 팔아넘기는 과제를 맡고 있습니다. 업계에서 ‘벌크 세일’이라고 부르는 험한 일입니다. 미국 뉴욕 지점에서 두 번이나 근무하고 최근까지 인수합병 업무를 담당하던 최고 엘리트 은행원인 시바노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인사지만 군말 없이 받아들입니다. ‘미쓰바은행 최고의 비관주의자’라고 놀림받으면서까지 버블 가능성을 경고했고 부실채권의 조속한 처리를 강하게 주장해온 책임감 때문입니다.

‘비관주의자’의 부실채권 팔기

벌크 세일의 상대는 미국 투자회사 KKL의 일본 법인 호라이즌 캐피탈 대표 와시즈 마사히코입니다. 와시즈는 KKL 본사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면서 ‘골든 이글’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네 번째 시니어 파트너로 승진한 인물입니다.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인데다 다른 세 시니어 파트너는 모두 창업자라 월스트리트를 깜짝 놀라게 한 인물입니다. 와시즈는 부실기업 인수를 목적으로 하는 벌처 펀드 업계의 대표주자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벌처(Vulture) 또는 콘도르(Condor)의 일본어입니다.

미쓰바은행과의 첫 회의에 와시즈는 미국 투자은행 골드버그 콜스의 린 헤드포드와 한 팀을 이루어 참석합니다. 벌크 세일에 나온 채권의 장부가는 700억엔이 넘지만 부실 덩어리라 은행 쪽은 300억엔 정도에 매각하면 다행이라 생각하고 최저한도는 200억엔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쓰바 쪽은 대규모 부실채권 처리가 처음인데다 폭력배와 정치인들에 대한 밝힐 수 없는 대출도 많이 끼워두었기 때문에 위축돼 있습니다. 호라이즌과 골드버그는 업무 경험이 많고, 회계비리 등 상대의 약점을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관 부처인 대장성(일본의 예산, 조세, 금융을 담당하는 부처로 2001년 재무성으로 재편됩니다)의 노골적인 후원까지 받고 있어 말 그대로 미쓰바를 가지고 놉니다. 최종적으로 채권은 72억엔에 호라이즌에 넘어갑니다. 게다가 호라이즌과 골드버그는 10억엔이 넘는 경비와 자문수수료까지 청구합니다.

호라이즌 캐피탈은 부실채권 인수 업무를 넘어서서 재무 위기에 몰린 일본의 알짜 기업을 인수한 뒤 회생시켜 비싼 가격에 되파는 본격적인 기업인수(PE)에 나섭니다. 도쿄소아이은행 등 여러 은행이 이들 손에 넘어갑니다. 와시즈가 가장 공들이는 것은 다이요제과입니다. 나부스코라는 제과회사 인수가 미국 본사가 유명해진 계기가 된 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이 회사는 훌륭한 제품을 가졌음에도 오너 일가가 썩었기 때문에 쉬운 타깃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1949년 설립된 다이요제과는 창업자 사망 뒤 이복형제들 사이에 내분이 생겼고, 지금은 큰며느리가 사장을, 둘째 아들이 부사장을 맡아 싸움을 봉합한 상태입니다. 임직원들도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는데, 내분보다 더 문제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심지어 3세들까지 모두 경영은 뒷전인 채 회사를 사유화해서 회사 재산을 탕진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호라이즌의 인수 시도를 ‘탐욕스러운 외국계 벌처 펀드의 공격’이라고 매도하면서 버팁니다.

대학 동창에게 칼 겨눈 ‘시바노’

시바노는 미쓰바은행을 그만두고 대학 동창 세토야마 가쓰히로가 경영하는 슈퍼마켓 체인 에비스야로 옮깁니다. 아버지로부터 에비스야를 물려받은 세토야마는 버블기에 무리하게 투자를 넓힌 탓에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설립했지만 버블 붕괴 뒤 가격이 급락하고 운영도 적자상태인 골프장은 큰 골칫거리입니다. 시바노는 뉴욕 지점 근무 시절부터 조만간 일본에 위기가 닥치면 회생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라 생각하고 조사와 연구를 수행해왔던 터라 실전에서 자기 생각을 입증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론보다 훨씬 더 험악합니다. 세토야마는 좋은 사람이지만 경영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해 회사 자금은 새고, 직원의 대규모 횡령과 분식회계까지 겹쳐 있습니다. 결국 시바노는 칼을 빼서 오너인 세토야마를 물러나게 합니다.

외국계 펀드의 일본 은행과 기업 인수가 있을 때마다 일본 전역에서 벌처 때리기가 일어납니다. 미국이 일본을 집어삼키려 한다거나 제2의 연합군 총사령부라는 사설이 신문에 실립니다. 그리고 그 피해자의 가면 뒤에서 기업의 오너와 경영진은 책임을 벌처에 전가하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합니다. 하지만 외국계 금융기관이라고 해서 마냥 깨끗하고 효율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정보기관 출신들까지 동원해서 기업인, 정치인, 관료들의 약점을 귀신처럼 찾아냅니다. 일본인 원로를 간판에 내세우고 자신들은 뒤에 숨어 실속을 챙기기도 합니다. 심지어 조세회피지역을 이용한 뇌물과 성 접대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기업과 인물들의 일본식 이름을 지우고 생각하면 한국과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것에 놀라게 됩니다. 소설이라 일부 과장됐겠지만 또 일본과 한국이 똑같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소설을 읽으며 일본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한국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고 느꼈다면 제가 너무 오버한 것일까요?

일본에는 한국과 달리 경제소설이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기업인, 금융인, 경제 관료 등을 주인공으로 해서 경제 현상을 그린 소설입니다. 문예소설은 아니고 장르소설 또는 통속소설이라고 분류할 수 있지만, 치밀한 취재가 바탕이 되면 잘 드러나지 않는 사회의 이면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분야는 기자에서 전업한 소설가가 제법 많이 있습니다. 마야마 진도 그렇고 과거 이 칼럼에서 다룬 ‘금융부식열도’의 다카스기 료 역시 경제지 기자 출신입니다. 신문 기사나 논픽션에 비해 글쓰기의 제약이 적어 경제나 금융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일본 소설에 비치는 한국 현실

저는 경제학자들의 책(리처드 쿠 ‘밸런스시트 불황으로 본 세계 경제’, 박상준 ‘불황터널’)이나 중앙은행 총재의 회고(시라카와 마사아키,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통해 일본 버블기에 대해 많이 배웠지만 어떤 답답함이 있었는데요. 이 책을 비롯한 일본 버블기의 경제소설들을 통해 생생한 실체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국내에도 이런 유의 소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마칩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마야마 진. 유튜브 갈무리

마야마 진
마야마 진은 196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소설가입니다. 도시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요미우리신문 기자를 거쳐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던 중 2004년 소설 ‘하게타카’로 데뷔했습니다. 소학교(초등학교) 시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가가 될 것을 고민하지만 세상을 바꿀 정도의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파벌을 만들어 국회 과반을 차지해야만 하고, 변호사가 되면 법정에서 이기더라도 사회를 변화시킬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혼자서도 사회를 향해 ‘세상이 이상하다’고 외칠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소설가가 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특이한 아이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게타카’는 출간 뒤 베스트셀러가 됐고, 엔에이치케이(NHK)와 티브이(TV)아사히에서 두 차례 드라마로 상영됐고, 2009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됐습니다. 국내에서는 이윤정의 번역으로 2008년 미래인이 출간했습니다.

*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입니다. 2주마다 연재.

일본 도쿄 상업지구 야경.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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