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인어공주 퇴출?!”…트럼프가 문화계 PC주의·워키즘 영향줄까
美 보수진영 “이미 구체적인 액션 시작”
국내에도 영향…표현의 자유 고려해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당선으로 향후 전세계 문화계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에 대한 논의가 더욱 격해질 전망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미국 진보진영의 PC주의인 ‘Woke’(깨어나기·미국 사회에서 간과되거나 무시되어 온 시스템적 인종 차별에 대해 예리하게 인식하기) 운동에 대해 일찌감치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가 재선에 성공한데에는 미국 사회의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이 한 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19일 문화계 등에 따르면, 워키즘(Wokeism)은 한국에서도 2023년작 디즈니의 인어공주 실사판를 통해 뚜렷이 각인됐다. 애니메이션 속 빨간머리의 북유럽 백인 캐릭터 아리엘(Ariel)을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가 맡으면서 ‘원작 파괴’, ‘과도한 PC주의’ 등 비판 여론이 국내에서도 들끓었기 때문이다.
지난 5일 트럼프 당선과 함께 미국에서 시작된 PC주의와 반PC주의의 본격적인 격돌은 이미 전세계 문화계에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문화계에서도 최근 몇 년간 코미디, 개그 프로를 둘러싸고 ‘약자에 대한 조롱’이라는 비판과 함께 ‘과도한 PC주의’라는 비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만큼 관심있게 주시할 문제다.
민주당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한 지난 4년 여간 적색주(red states·공화당 지지 성향이 높은 지역)는 물론 미 전역에서 워키즘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 워키즘 친화 기업인 ‘디즈니’가 소재한 플로리다에서는 공화당 소속 론 드산티스 주지사가 공개적으로 디즈니와의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다. 드산티스 주지사는 실제로 법안을 통과시켜 디즈니 지구에 부여해온 특별 세금 혜택을 박탈하며 압박을 가했다.
워키즘 운동이 선전하면 곧장 백래시(backlash)가 따라붙었다. 2020년께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 이후 미국내 여러 브랜드가 인종 고정관념과 관련된 이름이나 로고를 재평가하고 변경하는 등의 사회적 변화가 이어졌다. 학교와 기업에서도 변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보수적인 학부모들은 교육 시스템 내 반인종주의 운동에 분노, 교육위원회 회의에 몰려들었다. 이에 몇몇 적색주에서는 교실이나 학교 자료에서 인종, 성별, 성에 대한 논의를 줄이는 법안이 통과됐다.
2025년은 대통령은 물론 의회의 상원과 하원 모두 공화당이 장악하면서 미국 문화계에서 진보적 워키즘은 더욱 거센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됐다. 심지어 몇몇 민주당원들 조차 이번 선거 패배의 원인을 워키즘에 전가하고 있는 만큼 더욱 입지가 좁아질 전망이다.
워키즘의 지지자인 진보성향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깊은 낙담이 퍼졌다. 아이비리그 학교들은 트럼프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자 ‘학생들이 너무나 큰 스트레스를 받을 것을 염려해’ 우유와 쿠키를 제공하고 색칠놀이를 독려하는 등 ‘위로’에 나섰다. 하버드대에서는 대선 다음날 하루 동안 다양한 수업이 취소됐고, 펜실베니아대에서는 ‘학생들의 충격을 염려해’ 시험을 연기했다. 다트머스에서도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저녁 식사를 제공했다.
반면 보수성향의 미디어계는 축포를 터트리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우파들의 유튜브로 불리는 ‘럼블’(Rumble)’의 최고 경영자 크리스 파블로브스키는 트럼프 당선 직후 컨퍼런스콜에서 “우리의 기회에 대해 이보다 낙관적이었던 적은 없었다”면서 “언론의 자유를 찾았고, 럼블은 그 선두에 있다”고 언급했다.
럼블은 자유주의 투자자 피터 틸과 트럼프의 부통령인 J. D. 밴스가 초기 투자자로 이름을 올린 회사로 지난 2022년에는 억만장자 하워드 루트닉이 운영하는 월스트리트 그룹 캔터 피츠제럴드를 통해 증시 상장에도 성공했다. 하워드 루트닉은 트럼프 인수위원회의 공동 의장으로, 차기 행정부에서 재무부 장관 후보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인사다. 샘 울리 피츠버그대 커뮤니케이션 부교수는 미국 정치 전문매체 ‘악시오스’에 “트럼프가 취임하면 럼블과 같은 우파 플랫폼 중 상당수가 제도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세계 정치·경제·문화 1번지인 미국에서 촉발된 변화는 주변국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미국에서 워키즘이 있었다면 한국도 미디어의 PC주의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 NBC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의 포맷을 한국식으로 변형한 ‘SNL 코리아’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와 국정감사에 출석해 증언하는 뉴진스의 외국인 멤버 팜 하니를 모사한 시즌6 8화가 있다.
SNL 배우들이 외국인 하니의 어눌한 한국말을 흉내 내고, 한강 작가의 과거 인터뷰 모습을 과장해 굽은 자세, 눈을 거의 감은 듯한 표정으로 연기하자 시청자들은 “외국인이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국회에서 증언하는 와중에 조롱하는 한국 코미디 클라스”, “한강의 말투와 외모를 흉내 내서 프로그램이 말하고 싶은 게 뭔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한국 방송” 등과 같은 비판과 회의를 쏟아냈다.
이러한 비판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지만 이를 두고 과도한 PC주의는 경계해야 한다는 우려 역시 공존하는 게 사실이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 개개인마다 설정한 정치적 올바름의 정도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청자에게는 아이돌 멤버 하니와 노벨상 수상자 한강 작가는 정치인과 같은 공인이며 강자이기에 이들에 대한 모사가 크게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나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은 항상 싸운다. 다만 둘 사이의 갈등이 과도해질 때 사람들은 토론하는 대신 침묵을 선택하곤 한다. ‘잘못된 단어-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2024)의 저자 르네 피스터 기자는 “이는 민주주의에 어긋나며 사회에서 합리적인 정치문화가 실종되면서 극우 보수와 극단적 진보 세력의 양극화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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